경전공부

[스크랩] 최봉수교수(고통의 바른 극복)

wonho lim(혜일) 2012. 1. 12. 17:59
최봉수교수-불교 입문강좌
불교입문11강-고통의 바른 극복

종교와 미신을 구분 짓는 기준을 종교학자들은
아주 간략하게 표현했습니다.
종교란 '고통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요.
미신은 '고통을 회피하게 하는 것'이다.
대단히 간략한 그와 같은 표현입니다만은
이 표현이 지니고 있는 이유는 엄청납니다.

우리는 여러 각도에서 충분히 음미해야 되고,
그와 같은 음미를 통하여 정말 불교야말로
고통을 극복하게 하는 대표적인 종교구나!
따라서 가장 반미신적인 종교는 오히려 불교구나!
하는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고통을 회피하게 하는 미신의 경우를 우리는 많이 만나게 됩니다.
아주 극단적인 고통 불치의 병과 같은 그런 극단적인 고통에 억압당하여 있는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종교야 말로 정말 필요한 구원입니다.
그런데 종교를 만난답시고 만난 것이 미신일 경우를 왕왕 보게 됩니다.

"이 약만 먹으면 낫습니다. 안수기도 몇 번하고 나면 낫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 그와 같은 것을 따라가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따라가 봅니다. 그래서 약을 먹어 봅니다.
약을 먹어보니 정말 아프지도 않고, 고통도 사라집니다.
그 약을 제공한 사람은 이야기 합니다. "이제 나았습니다.
의사들이 병원에서 몇 개월밖에 못삽니다.
평가한 그런 불치의 병이라고 한다면은 의사들은 그와 같은 평가를 내리기에 상당히 고민했고, 최대한 여유를 두고 봐도 그렇게 밖에 생존할 가능성이 없을 때 그런 평가를 내립니다.
그와 같은 병에 걸린 사람이 그런 알약 몇 알을 먹었다고 과연 그 병으로부터 회복이 되는 것일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그 약을 통하여 고통을 잠시 피한 것일 뿐이겠죠. 그것을 보고 뭐라고 하느냐? 종교에서는 미신적인 행태라고 이야기 합니다.
편리한 환상이나 또는 마약과 같은 그런 약품을 통하여 순간적으로 그 고통을 잠시 잊도록 해주는 것. 그걸 가지고 마치 고통이 완전히 해결될 것인 냥 이야기를 할 때 그것을 우리는 미신이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죠..
그에 비하여 종교는 뭐냐? 그렇게 고통에 억압 당하여 있는 사람에게 그 고통을 피하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아프리카의 젊은이들이 죽음의 고통 앞에서 그것과 맞부딪혀 싸웠듯이 그 고통과 정면으로 쳐다보고 싸울 수 있는 힘을 불어 넣어주고, 스스로의 힘으로 싸우게 만들고 이기게 만드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래서 종교학자들은 가끔 종교를 규정할 때 hard to suffer sufferring이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고통을 고통 하려고 애쓰는 것. 그것이 종교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나에게 고통이 닥쳐 왔을 때 그 고통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그 고통과 하나 되어버리고 그 고통과 하나되어 애쓰는 그 순간에 종교라는 것이 숨쉬고 있다. 그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저는 고통을 고통 하려고 애쓰는 것이 종교다라고 하는 그와 같은 종교의 정의를 접하면서 처음에는 그 뜻이 잘 들어오지를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뜻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아주 소중한 간접 경험을 한번하게 됩니다.
이런 공개된 자리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합당한 줄 모르겠습니다만은 저의 아내가 저의 아이를 분만하는 그때 이야기입니다.
비교적 나이가 든 상황에서 잉태를 했고, 또 초산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아이를 낳는데 많이 힘이 들었던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진통이 시작되고, 출산을 하려고 하는데 이 아이가 제대로 출산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산을 도와주는 의사가 그런 이야기를 하드랍니다. "어머니 이 아이가 지금 이 상황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고 한다면은 아주 심각한 후유증을 앓을 줄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든 이 아이를 출산하도록 힘을 쓰셔야 합니다.
힘을 좀 더 주십시요" 그렇게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그때 저의 아내가 의사 선생님께 그렇게 여쭈었다고 합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더 힘을 쓸 수가 있느냐고.
저도 남성이기 때문에 아이 낳는 그와 같은 직접적인 경험은 없습니다만 여자 분들은 그런 경험이 다 있을 거예요.
생리적으로 힘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더 힘을 주라는 거예요.

그러자 그 의사선생님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더 힘을 주는 방법이 있습니다. 더 아프면 됩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드랍니다.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럽습니까? 그러나 더 아프려고 한다면은 그게 더 힘을 주는 것이요 더 힘을 주게 되면은 아이가 무사히 출산할 수 있다라는 겁니다. 그러자 저의 아내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이 아이의 안전한 출산을 위하여 나는 더 아파야 되겠다. 더 고통 해야 되겠다.' 고통을 고통 하려고 애써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답니다. 고통을 고통 하려고 애쓰는 거 hard to suffer suffering 종교의 정의가 그대로 적용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 더 고통하기를 바라고, 더 고통 하려 애쓰던 끝에 무사히 아이는 출산하게 되고 새로운 생명이 세상에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축복이죠. 고통 끝에 생명의 탄생이라고 하는 축복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피했다면은 그 아픔이 두려워서 회피했다고 한다면은 무슨 일이 벌어졌을 줄 아무도 모르는 거죠. 더 끔찍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줄 모릅니다만 그 고통 속에서 기꺼이 그 고통을 달게 받고 고통 하려고 애썼던 끝에 생명이라고 하는 거룩한 탄생이 있게 되었고,
고통은 말끔히 사라지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저는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고통의 의미가 그런 것 아니냐? 저의 인생 속에 찾아오는 고통의 의미나 모습이 그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고통은 분명히 힘들고 견디기 어려운 것들 입니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 고통 하려고 애쓰고, 그 고통을 이겨 내었을 때 그 고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고통의 여러 배가 넘는 그런 기쁨과 행복이 찾아 오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부질없게 해보기도 합니다.

고타마 붓다는 한 경전에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갈구하는 고통의 정체를 꿰뚫어라. 그러면 그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되리라" [소니카야 자설경] 고통의 한 가운데 깊숙이 들어가서 그 고통의 정체를 파악하는 순간 그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 그리고 그 고통으로부터의 극복 그리고 고통은 사라지고 기쁨이 넘쳐 나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 그것이 고통이 우리에게 안겨다 주는 의미 아닌가? 하는 것을 종교는 통찰하고 있는 줄 모릅니다. 그러기에 종교는 이야기 합니다. 고통을 회피하지 말라. 고통을 극복하라.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미신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현상들은 한결같이 그 고통을 편리한 환상이나 강압적인 수단으로 살짝 피하게 만들고, 그러면서 그것이 고통이 완전히 해결된 것인 냥 고통하는 사람을 속입니다.
그래서 사기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고통을 피하기만 하고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기만 하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 더 큰 고통에 압도 당하여 죽게 되고, 세세생생 그와 같은 고통과 악순환이 되풀이 될 뿐입니다.
바른 종교를 만나야 됩니다. 바른 종교를 통하여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도움을 받아야 되고,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부여 받아야 되고,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받아야 됩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힘으로 고통을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죠. 이와 같이 고통을 극복해야 된다는 말과 고통을 회피한다는 말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고 있는 현상 속에서도 우리가 고통할 때 그 고통을 살짝 피하게 만듦으로써 미신과 같은 종교가 있습니다. 우리가 미신이라고 불렀을 줄 모르는 그런 무교나 샤머니즘 속에서도 고통을 고통으로 바로 들어가고,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그런 강력한 힘을 부여하는 그런 종교로써의 샤머니즘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종교이고, 무엇이 미신이냐? 불교, 기독교이면 종교이고, 샤머니즘이면 미신이다. 이런 식으로 나눌 수는 없는 겁니다. 그 종교를 통하여 내가 고통을 극복할 수 있으면 종교이고, 그 어떤 것을 통하여 내가 고통을 회피하다가, 도망가다가 결국 더 큰 고통에 압도당해 버린다면은 그건 미신이다. 종교학자들은 그렇게 규정하고 싶어하는 줄 모릅니다. 그런 과정, 그런 정의 속에서 이제 우리는 두 가지를 살펴야 됩니다. 하나는 뭐냐? 불교라는 종교는 과연 고통을 극복하게 하는 기능을 제대로 행사하고 있느냐? 하는
차원입니다. 우선 선언적으로 살필 때 불교야말로 고통에 대한 강력한 대응과 극복의 논리와 방법론을 구사하고 있는 종교다라는 것을 힘주어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불교 경전을 보게 되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칫 오해하게 하는 요소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괴로움에 대한 표현들 입니다. 너무나도 많은 곳에서 불교 경전들은 괴로움과 고통에 대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고해라고 부릅니다.
인생이 온통 괴로움의 바다에 빠진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왜 우리 사는 인생에 행복도 즐거움도 조금이라도 있지 없습니까? 그러나 불교에서는 아예 괴로움의 바다에 빠졌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태어나는 것도 고통이요. 늙는 것, 병 드는 것, 죽는 것이 다 고통이며 살았다 하더라도 구하는 것 제대로 얻지 못하니 고통이요. 미운 자와는 왜 그리 자주 만나고, 사랑하는 자와는 왜 그리 빨리 헤어지는지 그들이 다 고통이다. 산다는 게 다 고통이다. 불교는 결국 온갖 고통에 대한 이야기 뿐입니다. 그래서 많은 종교학자들이 불교 경전을 보고는 그런 이야기를 하죠. 지나치게 염세적이다. 지나치게 비관적이다. 인생에 존재하는 긍정적이고, 밝은 면을 보려고 애를 쓰지는 않고, 그런 어두운 면, 고통스러운 면, 힘든 면만 보려고 하는 검은색의 종교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여러가지 오해 중에서도 대표적인 오해가 그런 오해입니다. 왜 고타마 붓다인들 부처님인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고 즐거움을 안겨 다 주고, 보다 기쁜 삶을 살도록 하는 그런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불교의 목적이 무엇인데요? 행복입니다. 인간과 천신, 온 중생의 행복, 여러분과 저의 행복을 위한 가르침이 불교입니다. 이제 우리가 공부하다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타마 붓다가 생각하는 종교에 있어서의 행복은 어떠해야 하느냐? 그건 일시적인 행복이어서는 안된 다는 겁니다. 순간적인 행복이어서는 안된 다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행복할 때 있습니다. 기분 좋고, 기쁠 때 있습니다. 젊은 건강을 구가하면서 푸른 청춘 아래서 노래 부르고 내 달릴 때 얼마나 기쁘고 즐겁습니까? 문제는 그게 얼마나 오래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영원히만 가면 왜 그것을 찬탄하지 않고, 칭송하지 않겠습니까만은 얼마가지 못하더라는 겁니다. 밝은 눈으로 세상을 뚜렷하게 보면은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러나 그 눈이 오랫동안 계속 그렇게 밝지 않다라는 겁니다. 저도 안경을 끼고 있습니다만 이 안경을 벗으면 잘 안보입니다. 처음엔 저도 잘 보이는 눈 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덧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어느덧 행복은 불행으로 바뀝니다.

행복 속에 불행의 법이 있음을 철견하고,
젊음 속에 늙음이 있음을 통찰하고,
삶 속에 죽음이 있음을 직관하라.
고타마 붓다는 그렇게 가르칩니다.
왜 그렇게 가르쳤을까요?

우리 인생 속에 있는 고통을 들추어 내어서 우리로 하여금 겁을 주려고 그렇게 하신 건 아닐 겁니다.
진정한 행복, 영원한 행복, 완벽한 행복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고통이라는 것을 제거하지 않으면 됩니다.
결국에는 고통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해결하자. 불교에서 고통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바로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 인생이 고통 속에 제압 당하여 있고, 압도되어 있음을 우선 바로 볼 줄 알아야 된다라는 이유때문 입니다.

젊음에 사로 잡혀 잠시동안의 기쁨에 사로잡혀 잠시 동안 그 고통을 피해있는 미신적인 기쁨에 사로잡혀 앞으로 닥쳐올 죽음과 늙음과 병듬의 고통에 대비하지 않는다면은 막상 그 일이 닥쳤을 때 후회해도 소용없다라는 겁니다.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잠시의 기쁨에 눈이 팔려 본질적인 고통을 회피하지 말라는 겁니다. 잊어버리지 말라는 겁니다. 은폐 당하지 말라는 겁니다. 고통이 고통임을 바로 보게 하는 겁니다.
인생은 고통입니다. 결국에는 고통입니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뿐만 아니라 고타마 붓다는 뭐라고 합니까? 태어나는 것부터 고통이라 합니다. 태어날 때도 고통입니다. 아기를 출산하는 어머니도 고통이지만 탄생하는 순간의 아이도 그것만한 고통이 없습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다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고통스러웠을 거예요. 양수가 터지고 산도가 열리면서 세상 밖으로 나가려고 했을 때 그 아이에게는 이제 탯줄을 통한 산소도 제대로 공급되지 가 않습니다. 답답한 숨을 찾으면서 그 좁은 길 속에 전혀 다른 상황 속에서 아이는 직감적으로 죽는구나 하고 느낄 겁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고 이 절망스러운 상황이 어떻게 좀 빨리 끝나주기를 갈망하고 갈망하겠죠. 그러나 언제 그 상황이 끝날지 아무 언질도 아무런 낙관적인 그러한 조짐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힘들 때 한시간 뒤면 끝난다. 10분만 참아라. 그 말이 그렇게 위안이 됩니다. 그러나 태어나는 아이에게 이게 언제 끝날 줄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절망 속에서 태어납니다. 그 고통 생각해 보셨습니까? 짐작해 봐야 합니다. 그래서 다들 울고 태어납니다. 태어나는 아이들 다 울고 태어난다고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사람들이 웃습니다. 정말 고통스럽게 태어나는 거니까 우는 겁니다. 그 우는 모습보면 평화롭지 않습니다. 고뇌에 찌들은 얼굴로 울어 제칩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렇게 하겠어요. 태어나는 것도 고통입니다. 살아가면서도 고통입니다. 원하는 대로 얻어지지 않고, 만나는 사람 다 예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늙고, 병들고, 죽게 됩니다.

그게 우리 인생이라면 어떻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인생임을 바로 보라는 겁니다. 똑바로 쳐다 보라는 겁니다. 그래야지 그러한 인생의 문제점이 뭔가를 추구해 들어가고, 극복할 수 있는 제대로 된 방법이 나올 것 아닙니
까?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 종교라고 했습니다. 고통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 고통을 직시하는 것부터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쳐다봐야지 그 고통의 정체가 드러나고, 고통의 정체가 드러나야지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이 나타나고, 그 방법대로 실천해야지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아니겠느냐?
첫번째 순서는 고통을 고통이라고 바로 볼 줄 아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주장하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실 중에서 첫번째 진실이 괴로움의 진실입니다. 괴로움을 괴로움이라고 바로 봐라. 그것이야말로 진실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따라서 불교라고 하는 종교 전면에 나타나고 있는 수많은 고통의 선언은 불교를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종교로 이해하는 그런 소재나 근거로 삼으셔서는 잘못된 것입니다.

고타마 붓다는 이 한 생에 존재하는 고통만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너희 세세생생이 그러한 고통스러운 삶의 되풀이다"라고 이야기 하면서 인생의 고통을 이야기 함에 있어서 절정에 치 닿고 있습니다.
하루는 고타마 붓다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많은 제자들과 함께 어느 바닷가에 이르러셨습니다. 넘실대는 인도양의 바다를 쳐다보면서 질문합니다. "너희들이 생사윤회 하는 가운데 흘렸을 눈물과 저 바다의 물 중에 어느것이 많다라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이야기 합니다.

"저희들이 세존의 뜻을 제대로 이해했다면은 저 넘실거리는 바다의 물보다 저희들이 윤회 중에 흘렸을 눈물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세세생생 흘렸을 눈물이 저 넘실대는 인도양의 바닷물보다 많다라고 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눈물은 왜 흘립니까? 기뻐서도 흘리지만 슬퍼서도 흘립니다.
아파서 흘리고, 고통스러워서 흘립니다. 고통에 흘린 눈물이 바닷물보다 더 많은 것이 우리 생존의 현실임을 직시하라. 고통이 고통임을 직시하라. 그럴 때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 비로소 열리게 된다라고 가르치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이런 불교라는 종교를 두고 법당에 들어가니까 무슨 존상들이 그렇게 많냐? 부처님 뒤에 또 부처님이 있고, 옆에도 또 보살님들이 있고, 온갖 존상님들이 모여 있으니까 우상숭배다. 미신이다. 정말로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견해입니다.

불교는 종교입니다. 아주 강력한 미신에 대한 대치의 기능을 가진 종교가 바로 불교입니다.
고통이 고통임을 그렇게 강하게 전제하고, 직시하라고 가르치는 종교이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치는 이유는 뭡니까?
너희들이 제대로 고통이 고통임을 바로 볼 때 인생이 고통임을 쳐다볼 줄 알고, 통찰할 줄 알 때 그런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그 길을 내가 갖고 있기도 하고… 종교가 뭡니까? 인간이 지닌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서 해결해 준다고 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우리가 지닌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서 해답이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 해답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 고통이 고통임을 먼저 직시하고 고통을 고통 하려고 애쓰라는 겁니다. 그리하여 고통의 정체를 꿰뚫으라는 겁니다. 그럴 때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종교가 불교입니다. 그런 종교를 미신이다라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불교와의 만남은 가장 강력한 반미신적인 종교와의 만남. 그리고 샤머니즘과 불교를 일치시키는 것도 크게 온당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문제를 나쁜 악령의 빙의로 해석을 하고 그 악령을 쫓아냄으로 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기독교적인 요소에서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사제들이 바로 그런 마귀를 쫓는 사람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아실 겁니다.
따라서 불교라고 하는 종교를 샤머니즘과 연결시키는 것도 그것도 그렇게 정당하다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미신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더욱더 온당하지 못한 그러한 입장이다라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 하고 있죠. 그렇습니다. 고통을 극복하게 하면 그건 종교요. 고통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고 힘을 주면은 종교요. 편리한 환상 속에서 그 고통을 잊어버리게 한다면은 그건 미신이다. 한 때 우리나라의 유명한 가수가 있었는데 필리핀에 있는 한 의사가 칼을 대지 않고 수술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수술장면을 비디오로 찍어서 우리나라에도 유통된 적이 있었습니다. 위암이 걸려있는 사람이 가니까 손으로 환부를 만지더니 뱃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서 그 암 덩어리를 뽑아 내더군요. 그러더니 "이게 너의 병소다"하고 버리더니 손으로 쓱쓱 마무리를 지으니까 환부가 깨끗이 나아버렸어요. 정말 신통하고, 기적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는 다 나았다고… 정말 그 환자는 진정으로 위암 환자였다면 그 병에서 나았을까요? 그것이 뭡니까? 미신입니다. 편리한 환상, 강압적인 수단으로 잊어버리게 한 것이죠. 고통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 종교요. 고통을 회피하는 것이 미신이다라고 하는 입장을 새기면서, 종교의 삼태(三態)라고 하는 주제를 하나 더 살피면서, 불교는 미신이 아니다.

불교야 말로 진정한 종교다라고 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는 시간을 다음 시간에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 뜬구름이 머무는 곳...
글쓴이 : 뜬구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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