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강의
大方廣佛華嚴經 略纂偈(대방광불화엄경 약찬게)
2016, 4, 8 금 동산법사단 강의
혜일 임원호 법사
동 혜
90)菩薩十住梵行品(보살십주범행품):십주품과 범행품
1)十住品(십주품)
대승불교에서 성불(成佛)하는 수행단계(修行段階)를 설명할 때는 보통52계위(階位)를 가지고 설명한다. 52계위는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십회향(十回向)⋅십지(十地)⋅등각(等覺)⋅묘각(妙覺)으로 십신(十信)부터 십지(十地)까지 각각 10단계의 수행계위(修行階位)를 나누고 이에 등각, 묘각을 설명한다.
이러한 수행계위의 나열 단계 과정은 화엄경에서 볼 수 있다. 52위 가운데 십신의 10가지 믿음 수행의 계위는 정확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경(經 )전체를 주목할 때 믿음은 보살의 행(行)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십신(十信)을 갖는다고 보아진다.
화엄경(華嚴經)에서 10이란 숫자를 중심으로 보살도의 단계를 설명함과 아울러 십(十)에 의한 구조로 화엄의 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십의 뜻은 곧 만수(滿數)로 여기어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는 뜻을 나타내는 진리(眞理)로움의 법수(法數)로 설명하고 있다.
먼저 십주품(十住品)의 개요(槪要)는 설처(說處)가 천상계(天上界)인 도리천(忉利天)에서 설하신 내용으로서 장소는 수미정상(須彌頂上)에 소재한 제석천궁(帝釋天宮)이다. 도리천궁은 삼계(三界) 가운데 욕계의 6욕천중 두 번째 천계로 수미산 정상에 위치한다.
또한 설주(說主)는 법혜보살(法慧菩薩)이 중심이 되고 있다. 법혜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도리천(忉利天, 제석천)의 묘승전에 들어가 가부좌를 하고 계시었을 때 부처님의 위신력에 위해 보살의 무량방편삼매에 들었다가 선정으로부터 일어나서 보살들에게 법을 설하게 된다. 이 때 교설한 내용이 십주(十住)이다.
십주는 부처님 집에 머무는데 있어 10가지 수행의 덕목(德目)을 원만히 하는 것이다. 여기서 ‘머문다.’는 것은 보살로서 수행의 마음가짐과도 통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10가지의 보살 마음을 냄으로써 깨달음의 세계를 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보살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상 상임을 알 수 있듯이, 10가지 수행주처(修行住處)에 수행덕목이 완성으로 진취(進就)되어 가는 법락(法樂) 성취에 의해 마음가짐을 지님으로 하여 수행자체의 해탈문(解脫門)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을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에서도 알 수 있다. 보살이 마음을 항복(降伏)받고 마음을 주(住)하는 것은 곧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고 한 것을 볼 때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져야 하느냐는 내용과 상통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가짐은 곧 수행의 덕목 완성을 구하는 지위와도 같다.
그러므로 10주는 곧 10가지 마음가짐을 내어서 보살의 행을 닦아 나가야만 된다고 법혜보살은 설법하였다. 그런데 10주는 다음 단계인 십행(十行)에 나아가는 앞 단계의 발판이지만, 십주 그 자체의 단계는 하나의 완전한 단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은 화엄경의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보통수행은 한 단계 한 단계 닦아서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고 보지만 화엄경(華嚴經)에서는 십(十)이라는 숫자 의미가 드러내고 있듯이, 단계의 그 자체는 완전성을 갖추는 형태로 되어 있어 독립적인 불과(佛果)의 행이라고도 불 수 있다. 이 점을 십주품(十住品)에서는 보살이 머무는 곳을 “넓고 커서 볍계 허공 같다.” 라고 하였으며, 보살은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의 집에 머물다(주삼세불가:住三世佛家) 라고 하였다.
보살이 부처님 집에 머문다는 것은 이미 보살의 행을 통해 부처님의 공덕을 성취코자 수행의 덕목과 법락(法樂)이 제시한 과정 전체를 완성된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0주품(十住品)을 보면 각 경지의 단계마다 10가지의 10법이 있는 특이한 점을 보인다. 이러한 10주 보살이 마음을 내어 마음가짐을 낸 지위(地位)의 주처(住處)는 10가지이다.
10주는 초발심주(初發心住)⋅치지주(治地住)⋅수행주(修行住)⋅생귀주(生貴住)⋅구족방편주(具足方便住)⋅정심주(正心住)⋅불퇴주(不退住)⋅동진주(童眞住)⋅법왕자주(法王子住)⋅관정주(灌頂住)이다.
2)梵行品(범행품)
모든 집착을 떠난 청정(淸淨)한 범행(梵行)이야말로 최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범행이라는 것은 도덕적 생활, 해탈(解脫)을 위한 종교적 생활이나 수행이다. 도덕적 생활이란 진정한 가치, 즉 신을 추구하는 생활이다. 그렇다면 선(禪)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행복은 모든 욕구가 충족되어 고뇌가 없이 평화로운 상태다. 우리는 이렇게 행복하게 살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우리의 희망은 항상 좌절된다. 우리의 욕구 가운데 가장 큰 욕구는 죽지 않고 살고 싶은 욕구다. 그러나 태어나서 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에서 해방(解放)되는 일일 것이다.
범행(brahma-cariya)이란 좁은 의미에서는 일상적인 삶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도덕적 생활을 의미하지만, 종교적(宗敎的)인 의미에서는 죽음이 없는 본원(本願)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행위를 의미한다. 따라서 범행이야말로 가장 큰 가치의 추구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범행은 어떻게 가능할까? 범행이 본원의 세계로 가기위한 실천이라면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본원의 세계에 대한 정견(正見), 즉 진리(眞理)가 문제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진리를 안다면 우리는 그 진리에 의해 올바른 가치의 추구가 가능할 것이다.
확언하면 진리에 기초하여 범행의 기본이 되는 가치관을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가 연기(緣起)하는 중도(中道)의 세계임을 모르는 사견(邪見)에 빠진, 유(有), 무(無), 단(斷), 상(常)의 모순 된 주장이 진리일 수 없음을 지적한 부처님께서 이들은 범행의 근본이 되지 못한다고 비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고, 이 같은 부처님의 비판은 가치론의 측면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가치관이 바르게 확립(確立)되지 않는 철학(哲學)을 통해 모든 고뇌가 종식된 열반(涅槃)의 세계에 갈 수는 없는 것이므로 열반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을 관찰(觀察)할 때 여러 과정을 지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수행의 과정을 지나기 전에 반드시 계율(戒律)을 잘 배워 지켜야 한다. 계율이 기준이 되고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기본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소양이 갖추어져 있어야 번뇌(煩惱)를 끊어 평정한 생활을 할 수 있다.
일반 사람들은 상식과 법률로서의 선악(善惡)을 판단한다. 그러나 출가수행자는 그것을 뛰어 넘어서 부처님의 계율(戒律)로서 마음에 일어나는 망상(妄想)의 선(善)과 악(惡)을 판단하여 모든 수행의 바탕으로 삼는다. 말하자면 계율이 바탕이 되어 선과 악을 잘 판단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계율은 악을 멀리하고 수행의 발판이 되며, 지계(持戒)는 그대로 수행하는 모습이다. 여기에서 팔정도(八正道), 육바라밀(六波羅蜜)등의 모든 수행(修行)이 이루어진다.
이는 자기의 마음을 보는 선수행(禪修行의 첫 단계이다.
그런데 수행이 이루어질 때 열반(涅槃)의의 성취는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이유는 법(法)은 인(因)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은 반드시 결과를 가져온다. 선과 악도 법(法)이다. 선과 악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당연하다. 즉, 출세간(出世間)의 선(禪)으로서의 팔정도, 육바라밀 등이 수행은 반드시 열반에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범행품은 정념천자(正念天子)가 법혜보살(法慧菩薩)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고 있다. ‘출가자는 어떻게 하여야 청정한 범행을 얻고 보리도(菩提道)에 이르러 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법혜보살이 대답하였다.
‘범행(梵行)을 닦을 때에는 몸과 신업(身業), 말과 구업(口業, 의(意)의 의업(意業)과 불(佛)과 법(法)과 승(僧)과 계(戒)등의 십법(十法)을 대상으로 하여 관찰하면 청정범행(淸淨梵行)을 이를 수 있다’ 고 말하고 있다. 범행을 이루는 주요한 요지는 관찰(觀察)하는 데에 있음을 유의하여야 한다.
법(法)을 간찰하면 십법(十法)의 본질이 있는 그대로 나타나며 동시에 청정범행은 이루어짐을 설한다. 즉 몸에 대해서는 부정(不淨)한 것으로 냄새나는 것으로 송장을 관찰하고, 몸의 업(業)에 대해서는 모든 행위를 관찰하며 말에 대해서는 음성, 숨, 가슴 등을 관찰하며 말의 업(業)이라면 인사. 문안, 칭찬(稱讚) 등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을 관찰할 경우에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온(五蘊)을 관찰하며 교법(敎法)을 관찰 할 경우에는 열반(涅槃), 불생(不生), 불기(不起), 불가설(不可說), 무분별(無分別), 무소행(無所行), 등을 관찰한다.. 승려(僧侶)에 대해서는 그 스님의 깨달음의 경지나 신통을 관찰하는 것이다. 계(戒)에 대해서는 계단(戒壇)이나 위의(威儀)의 가르침, 삭발하거나 가사를 입는 일과 걸식(乞食)하는 것 등이 계인지 관찰 하는 것이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 삼존상"
(중앙, 석가여래입상 : 현재, 좌, 제화갈라보살 입상 : 과거, 우, 미륵반가사유상 :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