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nho lim(혜일) 2017. 8. 14. 10:51


義湘大師 法性偈

                                                                                                 동산법사단 강의 2017. 8. 11 혜일 임 원 호


*法性圓融無二相(법성원융무이상)

법과 성품은 원융하여 두 가지 차별된 모양이 아니다.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아니다.

 

法性은 하나의 단어로 볼 수도 있고, 을 나누어 볼 수도 있다. 법과 성이 합쳐진 하나의 단어로 보면 法性眞性으로 풀이 되고, 看話禪이 뭣고에 대한 한 소식이기도 하다. 진성이란 如法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如法하다는 이야기는 자신이 무슨 뜻, 어떤 행동을 하든 간에 항상 眞理와 일치한다는 말이다. 法性을 한 글자씩 둘로 나누어 보면, 이란 본질이 나 本體, 또는 진리에 대해 겉으로 드러난 현상, 또는 규칙이나 규범 따위를 말한다. 破字하면 물와 갈로서 물이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자연의 법칙을 형상해서 법이라 한다. 여기서는 佛法을 의미로 한다.

 

主客으로 나누면 이 때 客體인 대상 · 경계로 보고, 主體로서 本性 · 根本을 의미한다. 이란 破字하면 마음 과 날 , 마음이 생겨났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사물의 本質이라는 의미로 다가가면 東洋學에서는 자주 거론되는 , 처럼 으로서 쌍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은 드러난 이고, 은 숨겨진 이며 이다. 또한 라 할 수 있다.

(理事無礙)

 

연꽃은 꽃을 피우기 전에 이미 씨를 같이 품고서 꽃을 피우듯 겉으로는 나누어 보이지만, 本來 둘이 아니다. 합쳐진 法性은 우리가 찾아야 할 잃어버린 , 마음이다. 법성이 圓融하다 함은 법의 성품은 모든 일에 圓滿하게 融合하여 정통하고 通達하며, 일체 變化에 얽 메이지 않고, 동서남북, , 하 사방팔방으로 自由自在 하게 두루하여 조금도 막힘이 없다고 풀이한다. 圓融會通의 근거가 되며 일체를 회통시키는 힘의 원천이다.

 

*諸法不動本來寂(제법부동본래적)

일체법은 움직이지 않고 본래 적멸(고요)하다.

 

여기서 이란 絶對가 아닌 드러난 현상을 나타내는 相對的 개념이다. 諸法不動을 나누어 풀자면 먼저 제법은 일체 모든 , 즉 어떤 현상이나 우주 일체가 드러난 모든 모습, 萬有를 일컫는다. 그리고 不動은 법의 本質을 나타내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만유의 속성은 本來 寂滅하다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자를 파자하면 물이 흘러가는 모양이다. 의 입장에 있으나 을 바탕으로 한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보건데, 수행적인 측면으로 본다면 不動寂滅과는 질적으로 좀 다르다. 不動이란 어떤 현상을 말하며 寂滅 이전단계로 이해해야 한다. 적멸이란 적적함마저도 한 단계로서 兩極端을 모두 벗어난 中道이며 이는 현상이 아니다.

 

부동을 협의적으로 해석한다면 부동은 대치적 개념으로서 兩邊極端에 서 있게 된다. 지구가 돌고 있어도 돌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좁은 체험과 견해를 가진 주간적 입장에서는 절대로 객관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가 없다. 主客을 던져버린 상태, 無我가 되었을 때만이 양 극단을 여윌 수 있기 때문이다.

 

<열반경>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이라는 경구가 있다. 諸行은 위의 諸法과도 성질이 같은데 無常, 즉 항상 함이 없다. 諸行은 항상 움직이며 끊임없이 變化한다. 이를 生滅法이라고 하는데, 나고 죽는 법을 말한다.

 

生滅이란 육체적 목숨의 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작게는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生滅滅已 즉 나고 죽는 것이 모두 사라졌을 때, 모든 煩惱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이를 解脫이라 일컫는다,

 

그러나 解脫은 마지막 단계가 아니다. 위의 주체인 本來寂이라는 의미와 같은 寂滅이 되어야 비로소 가 완성된다. 이렇게 완성된 도의 본질은 적멸상을 띠고 있기 때문에 결국 諸法不動하다고 표현한 것이다.

 

*無名無相絶一切(무명무상절일체)

(법성은)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고 일체 모든 것과 끊어졌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사성제 苦集滅道를 설하시면서 이와 버금가는 12緣起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無名으로 하여 , , 名色, 六入, , , , , , , 老死가 일어나며 또다시 無名으로 인하여 生命을 이어받아 끝없이 輪廻한다는 것이다.

 

生命 誕生根源은 일단 無名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하셨다. 무명이란 별도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며, 쉽게 이해해서 일단 無知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根本眞理에 대한 어두움, 생명의 기원에 대한 無關心, 삶과 죽음에 대한 몰이해 등 자신에 대한 근원적 물음은 회피하는, 아니 그러한 물음조차 할 수 없는 어리석음을 간단하게 말해 無名이라 한다.

 

無名으로 이 일어난다. 행은 業力이며 生命力이다. 그래서 精子卵子가 만났을 때의 힘을 行陰이라고 한다. 우리네 인생이란 좀 과장되게 표현한다면 업(Karma:까르마)만 남아 헐떡거리는 것이다.

 

法性이란 위의 絶一切된 것으로서 이 의미는 끊어져 있다.’는 것보다 오염되지 않았다.’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法性은 중생계와 따로 떨어진 별난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處染常淨이라. 비록 汚染된 곳에 있어도 一切 境界로부터 항상 끊어져 있기에 깨끗함을 유지한다. 絶一切가 끊어져 있다는 의미로 사용될 경우에는 법성은 일체 因緣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중생의 모든 因緣의 엉킨 실타래를 과감하게 잘라 끊어냄으로서 本來의 모습을 회복하며, 되찾은 法性으로 새로운 因緣의 실을 뽑아내는 것을 絶一切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절일체된 모습은 이름과 모양이 생겨나기 이전의 상태이며, 時間空間을 넘어선 자리다. 모든 事物은 처음부터 이름 지어지지 않았다. 인간 스스로 구별하기 위해 이름 지어진 것이지, 만일 처음 보는 물건이라면 그것을 무엇이라 하겠는가? 갓난아기가 처음부터 이름을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고리사슬처럼 이어진 無名에서 죽음까지의 단계는 깨달음이란 열쇠로 열고 들어가 波羅蜜이라는 修行으로써 걸러 갈 뿐이다. 육바라밀이라고 도 하는데, 불법을 배우는 순서로 나열하면 布施, 持戒, 忍辱, 精進, 禪定, 智慧이다. 이처럼 모름지기 수행자란 山川 境界가 펼쳐 저 있는 것을 바람이 나뭇가지에 스치듯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않고, 시간과 공간에 구애 받지 않는 大自由人의 걸음걸이로 그저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태양이 정오를 가리켜 그림자 한 점 조차 없을 무렵, 잿빛 승복, 상아빛 비단 목도리를 두른 건장한 젊은 비구 스님이 올곧게 뻗은 늙은 소나무 숲 사이로 난 붉은 황톳길을 홀로 묵묵히 걸어가는 뒷모습 이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