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강의
法性偈(義湘大師)
동산법사단 강의 2018. 1. 12(금) 혜일 임 원 호 법사
12 一念卽是無量劫(일념즉시무량겁: yī nìàn ji shì wú liàng jié)
‘일념이 곧 끝이 없는 무량겁이다.’
‘放下着 하라는 말은 執著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마음이란 게 그렇게 잘 되지 않는다. 이유가 뭘까? 집착하는 가장 큰 이유는 利害得失이다. 자신에게 이로운가, 해로운가, 얻을 것이 있는가, 잃어버림이 있는가에 따라 좋은 것은 절대 놓지 않으려고 하고, 싫은 것은 버리거나 멀리 하려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對話를 하더라도 자신에게 유리한 것은 잘 들리고 불리한 것은 전혀 들리지 않거나 사실과 다르게 왜곡해서 듣는다. 수많은 오해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반대로 스펀지가 물을 잘 빨아들이듯이 相對의 講義나 말이 귀에 쏙쏙 잘 들어오는 것은 自身의 固定觀念을 버렸기 때문이다. 집중이란 나를 버리는 것이다 흔히 푸른 숲이나 바다에 나가면 怳惚境(황홀경)에 빠져도 나를 잊는다. 나를 잊는 순간은 짜릿하다. 그러나 그렇게 잊는 것은 나중에 허무함이 더욱 밀려온다. 이런 것들은 짧고 질이 낮은 三昧이기 때문이다.
이런 三昧는 中毒性이 强하다. 하여튼 나를 버리면 相對와 내가 둘로 벌어지지 않기 때문에 말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린다. 말에는 말이 다니는 길인 語路가 있고 그 밑으로 意路가 있다. 그래서 禪家에서는 말에 따라가지 말라고 이야기 하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이다. 無意識, 潛在意識 속으로 의도한 바를 相對에게 傳達하기 위해서는 意識의 방해를 비켜나가야 한다. 그런데 듣는 사람은 相對의 말에 대한 숨겨진 의도가 무엇인지 순가 순간 자기 식으로 分別하고 판단 한다. 그래서 聖人들이 비유나 隱喩로써 수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意識이란 일종에 알음알이이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분별하기 때문에 쉽게 감동되지 않고, 설득되지 않고, 理解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를 버리거나 생각을 버리거나, 分別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때론 그런 나를 달래주기도 해야 한다. 이해하면 스스로 자신에게 반발하지 않는다. 그것이 敎學이 必要한 이유다.
사찰의 입구에 들어서면 ‘入此門來 莫存知解’ 라. ‘이문에 들어서면 알음알이(아는 것, 지식, 관념 따위)를 내지 마라.’는 내용을 보게 된다. 알음알이를 버려야 비로소 ‘定’에 들 수 있다. 定은 균형을 이룬 마음인데, 分別心이 사라진 마음이다. 道는 깨쳐야 하지만 定은 부단히 노력하여 닦아야 한다. 모든 宗敎와 修鍊의 공통분모가 定에 드는 것이다. 그러나 문 앞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分別한다. 枯木生花라 마른 나무에 꽃이 핀다. 여기서 枯木은 고요함의 極致인 無心이다. 무심한 마음에서 꽃이 피고 열매 맺는다.
體와 用을 언급했는데 主와 客, 能과 所로 나누어지면 一切가 꽃처럼 피어난다. 이때 時間과 空間도 예외가 아니다. 시간과 공간도 사용하면 나타나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無邊虛空이 覺所顯發이라, 參禪중에 깊이 들어가 오로지 ‘아는 것’하나 반짝이면 이 때 時間과 空間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用’이란 쓰고 나면 항상 그 體性이 ‘空’임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惺惺과 寂寂이 쌍을 이루고, 眞空妙有가 한 몸이 된다. 一門深入 이라. 道의 바닥에 깊이 다다를수록 자연스럽게 바라밀이 행해지는 도리가 여기 있다.
13 九世十世互相卽(구세십세호상즉: jiǔ shì shí shì hú xìang ji)
‘구세와 십세가 서로 모두 밀접하나’
九世 十世는 過去 現在 未來를 三世로 보고 삼세 속에 또 三世갸 있다고 보는 時間觀이다. 다시 말해서 過去의 과거, 과거의 현재, 과거의 미래, 現在의 과거·현재·미래, 未來의 과거·현재·미래로 합이 九世이다. 그리고 九世를 총괄적으로 바라보는 시점이 十世이다.
過去는 흘러갔고 未來는 오지 않았다. 現在란 현재라고 말할 수도 없다. 刹那生(찰나생), 刹那滅(찰나멸) 이다. 世上은 자기 마음의 投射(투사)요 그림자이다. 각자가 自身의 時間과 空間에 갇혀있다. 더욱이 절대고독에 휩싸이면 대개 안절부절 못한다. 절대고독이 란 오히려 靑福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무한한 自由로움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오래도록 새장 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길들여진 구속, 낯선 자유! 푸른 하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한 번도 自身을 되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다라’ 라는 소설 속의 내용 중에, 병 속에서 처음부터 아주 어린 새끼의 새를 키운다. 이제 그 새는 어미 새로 다 커서 성년이 되었다. 그래서 병의 주둥이는 새의 몸이 빠쳐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비좁아 있었다. 그런데 병을 깨거나 새의 몸을 다치지 않고, 절대 손을 대지 않고서 새를 꺼내는 방법이 무엇인가 라는 禪문답의 물음이다.
‘그’ 는 過去 · 現在 · 未來를 모두 아우르고 있으며 과거·현재·미래에 구속 되어있지도 않다. 그는 不生不滅 하며, 不垢不淨, 不增不減 이다.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지만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다. 더럽다 깨끗하다는 것은 내 생각일 뿐이다. 또한 더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三世의 부처님이 모두 다 이 한집 ‘그’ 안에 모여 계신다.
이해(깨달음) 하지 못했다면 이런 祈禱를 해야 한다. ‘모두가 나를 나쁘게 말 하고,다른 이가 나를 해롭게 하며, 그처럼 조롱해도 좋습니다. 이 모든 것이 깨달음을 이루는 因緣이 되게 하소서’(入菩提行論)
業障소멸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業을 녹이려면 마음이 비워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