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과 滅
일어남이 바로 사라짐(生과 滅)
생(生)과 멸(滅)을 통해서 해도 함이 없는 무위법(無爲法)으로 있는 차별법(差別法)을 살펴봅니다. 생(生)이란 어떤 것이 일어남을 이야기 하고 멸(滅)이란 어떤 것이 사라짐을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멸(生滅)은 무상으로 시공(時空)을 초월(超越)하여 벗어난 진여(眞如) · 공(空)의 끊임없는 자기변화(自己變化)입니다.
그리고 변화가 그대로 진여(眞如) · 공(空)의 표현인 것에서의 생멸 표현입니다. 이를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는 색(色) 그대로 공(空)이며 공(空) 그대로 색(色)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범부중생의 인식(認識)은 고정된 대상(對象)이 없이는 성립(成立)되지 않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인식(認識)이 대상(對象)을 고정하면서 실체(實體)를 만들기 때문에 생멸(生滅)그대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인 진여(眞如)를 잃어버리고 생상(生相)과 멸상(滅相)을 갖게 됩니다.
그리하여 진여(眞如)인 무상의 흐름이 시공의 제한된 인식으로 업화(業化)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알지 못하고 결정된 상(相), 곧 자성(自性)을 갖게 합니다.
자성(自性)을 갖게 되면서 마음이 닫히게 되고 번뇌(煩惱)가 뿌리를 내립니다. 여기에서도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는 시간 밖의 영원성만을 세우게 되고 현실의 삶이 그 진정한 의미를 잃게 됩니다.
그러나 자성(自性)을 갖지 않은 생멸이 덧없는 찰나가 그대로 공성(空性)의 자기표현일 때, 지금 우리 일상이 해탈(解脫)의 모습으로 긍정되면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선(禪)의 표현이 됩니다.
우리의 본래 마음은 언제나 열려 있는 해탈(解脫)이 근본(根本)이며 자성(自性)을 갖지 않습니다. 자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무상(無常) · 무아(無我)로 전 찰나와 후 찰나에 변함없는 동일한 자기의 모습을 이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밝고 어둠에 따라 눈의 인연조건이 변하지 않는다면 본다는 일이 일어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생각이 일어난 순간 이것을 명확히 지켜보아 무상으로 알아차릴 때, 중생의 제한된 시공이 닫힌 마음이 상을 갖지 않게 되고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전체로 살게 됩니다. 이것은 일어남이 바로 사라짐임을 보는 것입니다.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하는 것은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하나의 사실이 아닙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남은 우주(宇宙)전체의 인연(因緣)조건이 그 사건이 일어나도록 되어 있는 한 순간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하나의 사건(事件)에서 법계(法界)의 사건을 보는 것이고 그 사건 자체로서 무상(無常) · 무아(無我)를 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연조건은 잠시라도 멈춤 없는 변화(變化)로 생(生)이 그대로 멸(滅)이고 멸(滅)이 그대로 생(生)이면서도 그것이 우주법계(宇宙法界)의 생이며 멸입니다.
곧 생(生)도 생멸(生滅)이며 멸(滅)도 생멸(生滅)입니다. 따라서 동시 생멸이라고 해야 할 찰나를 온전히 표현한 말이 됩니다. 이렇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라지는 쪽에서 보면 불생(不生)이요 사라지는 것 같지만 일어나는 쪽에서 보면 불멸(不滅)이 됩니다.
우리가 삶이란 이와 같이 생과 멸이 동시에 함께 하는 총체적(總體的)인 흐름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이와 같이 나타내는 모양이 있음도 그대로 모양 없음을 동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어 없어질 것 같지만 그 없어짐이 바로 모양을 나타나게 됩니다. 역설적(逆說的)이게도 자기 모습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면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우리들의 삶입니다. 무상(無常)한 변화만이 우리들이 삶의 근본모습인 진여공성(眞如空性)을 나타내는 방법입니다.
따라서 태어남과 죽음이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 진여공성(眞如空性)이 가장 미묘한 나툼 인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편인식 태도는 일정한 시공(時空)에서 고정된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닫힌 마음이고 업(業)입니다.
한 생각이 일어날 때 마다 그것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빈 모습임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닫힌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