眞如門(진여문)과 生滅門(생멸문)
대승기신론은 馬鳴菩薩이 저술하였다. 大乘佛敎의 入門書로써 最適의 論書 라 할 수 있다. 대승기신론의 교리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냐 하면 한마디로 말해서 예부터 一心, 二門, 三大를 說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일심이란 物과 心, 자기와 世界 頭頭物物이 생긴 그대로가 根源이 되는 것인지라 衆生心이라 한다.
衆生心이란 대승의 근본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一心을 衆生心이라 하는 데는 반드시 기신론이 따르게 마련이다
二門이란 眞如門과 生滅門이 있는데 一心 그 자체가 煩惱 無明에 汚染되지 않고 淸淨한 狀態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眞如문이며 煩惱無明 작용에 起動 流轉해 가는 것이 生滅문 이다.
一心자체를 이렇게 두 종류로 나누는 것을 二門이라 한다. 三大라는 것은 體大. 相大, 用大를 말한다.
一心에 根據하여 體大를 말하자면 佛, 神, 人間, 惡魔, 動物 등 一切自然 모두가 一心밖에 없기 때문에 체가 위대하므로 체대라 한다. 다음으로 웃고(笑), 울(泣)며 즐거워하고(喜), 슬퍼(悲)하는 것이 體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일심에는 無量無數의 德相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이것을 덕상이라 하여 相大라 한다.
끝으로 用이란 宇宙에 존재하는 一切萬物을 움직이기 때문에 用이라 한다. 이와 같이 체대, 상대, 용대를 알게 되면 人生이 自然을 보는 眼目이 확실히 다르게 될 것이다. 감히 二門, 三大를 論한다는 것은 無理라고 보지만 간단하게 이야기하게 되니 부족한점 넓은 雅量으로 理解를 바란다.
大乘起信論(立義分)에서
*三大
原文: 所言義者 別有三種 云何謂三 一者體大 謂一切法 眞如平等 不增減故, 二者相大 謂如來藏 具足無量性 功德故, 三者 用大 能生 一切世間 出世間 善因果故
1은 體大이니 一切法의 眞如를 말하는 것이고 平等하여 增減이 없기 때문이며,
2는 相大인데 곧 如來藏을 말함이니 無量性 功德을 具足하였기 때문이요
3은 用大를 말하는데 一切세간과 出世間의 善의 因果를 낳기 때문이다.
義에서는 세 가지의 위대함을 설하니 첫째는 體大로서 眞如平等 自體이고
둘째는 相大로서 自體相의 功德이라 셋째는 用大로서 부처님의 能力이며
佛陀나 衆生이나 眞如의 體 平等하고 如來의 功德을 衆生心도 간직하니
위대한 佛陀 되어 衆生救濟 活動하고 體相用 그 三大로 우리중생 부처 되네
體大란 체가 크고 넓으며 얼마든지 크게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음을 말함이며, 相大란 안으로 포용, 용납할 수 있는 力量의 豊富함을 말함이고, 用大란 그 작용이 무엇보다 뛰어남을 말함으로서 이세가지 면에서 衆生心이라는 것은 참으로 위대하다는 것을 설명하여 밝히고자한 것으로 본다.
우리들 중생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란 근본적으로 따지고 보면 不增不減의 眞如이며 時間的으로나 空間的으로 無限廣大한 활동력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깨달았거나 迷(無明)했거나 이 진여의 體는 不增不減이다.
마치 거울에 추한 것을 비추거나 아름다운 것을 비추거나 거울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것(물체)을 치워버리면 거울 자체는 무엇 하나 변함이 없으며, 어디까지나 그 자체는 不增不減 한 것이다.
相大는 마음의 포용범위가 廣大無邊 함을 말함이며, 그것은 부처님 큰 智慧. 큰 光明이 具足해 있다는 것이다. 그 광명에 빛나는 마음은 찬란한 것이다. 本來 具足해 있는 그 光明을 迷해 있는 우리들이 다만 모르기 때문이다.
이 大光明은 빛의 비춤을 받을 때 우리들은 부처가 되는 向上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하겠다. 이 같이 대광명의 빛을 받게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는 부처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부처의 本體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어떤 때는 觀音菩薩의 모습으로 또는 阿彌陀佛의 모습으로 우리들 앞에 나타나신다.
*총설이문 : 일심의 두 과정
顯示正義者 依一心法有 二種門, 云何爲二. 一者心眞如門, 二者心生滅門, 是二種門, 皆各總攝一切法, 此義云何, 以是二門不相離故,
바른 뜻을 나타내는 것은 一心法에 依하는 것으로서 두 가지의 門이 있다. 무엇을 둘로 삼는 가 첫째는 心者二門이요, 둘째는 心生滅門이다. 이 뜻이 어찌 그러한가 하면 이 二門운 서로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바른 뜻을 여기에서 살펴보세 한마음 一心法엔 두 가지 門 있다는데
하나는 心眞如門 다른 하나 心生滅門 一切法 간직하니 둘이면서 하나라네
心眞如 心生滅門 분리될 수 없지만은 동일한 衆生心을 양쪽에서 觀察한 것
영원한 佛體로서 이를 보면 心眞如門 生滅의 현상에서 이를 보면 心生滅門
설화적인 면은 있지만 여기서 元曉大師를 살펴본다,
양양의 락산사에는 큰 觀音菩薩 상이 있다. 해안절벽의 義相臺에 가면 넓은 東海바다의 파도가 한눈에 펼쳐진다. 이 아름다운 곳의 락산사 에는 義相과 元曉大師에 얽힌 사연의 傳說을 보면 (삼국유사 권3), 해수가 분주히 드나들고 있는 동굴위에 義相 앞에 降現하신 觀世音菩薩이 奉安 되어있다. 의상은 여기서 관세음보살의 진신을 친견 할 수 있었으나 원효는 관음의 진신을 볼 수가 없었다. (홍련암)
그것은 破戒한 원효가 여성을 戱弄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원효는 관세음보살을 親見하러 이곳에 오게 되었는데, 락산 남쪽 논(畓) 길을 지날 무렵 흰옷을 입은 한 여인이 논 가운데서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는 농담 섞인 말투로 벼이삭을 하나 나에게 줄 수 없느냐고 하였다.
여인은 웃으면서 잘 영근 벼대신 말라버린 쭉정이 벼를 원효에게 주었다. 원효는 쭉정이 벼 이삭을 들고 걸어가는데 다리가 있었다. 다리 및 시냇물 에서는 한 여인이 경수(經水)로 더러워진 내의를 세탁하고 있었다. 갈증을 느낀 원효는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 여인은 세탁하여 더러워진 물을 떠서 원효에게 올렸다. 원효는 너무나 더러운 물이라 받은 물을 버리고 자기가 손수 깨끗한 물을 마셨던 것이다.
그 때였다 들판 소나무위에 푸른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원효를 향하여 거룩한 화상이어 실없는 짓은 하지 마시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새는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 소나무 밑에는 짚신 한 짝만 놓여 있는 것이다. 원효는 마침내 락산사에 도착하였다. 관음보살이 봉안되어 있는 좌대 밑에는 소나무 밑에서 본 짚신과 똑같은 짚신이 있었다. 이에 원효는 轄然히 깨달았다고 한다.
앞에 만났던 벼를 베던 여인이나, 빨래하던 여인이 모두가 관세음보살의 化身이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원효가 해안 동굴에 들어가 관음보살의 진여 상을 뵈옵고자 하였으나 風浪이 일어 동굴에 들어가지 못하고 마침내 포기하게 된다.
원효가 供養 받은 汚水를 마시고 쭉정이 벼 이삭을 감사히 받아 정대(正戴) 했던들 관음보살은 그 眞容을 顯身했을 것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원효의 마음에 한순간 迷 했다는 것은 미모의 여인을 보았기 때문이다. 여성을 본 원효는 아무런 생각 없이 소리쳤다. 이 마음의 한 瞬間 動搖함이 生滅 因緣의 相이라고 할 수 있다.
觀音의 眞身을 親見 코져 洛山寺까지 온 원효의 이 마음은 어디 까지나 종교적인 깨끗한 마음 이었다. 이 淸淨한 狀態의 마음을 眞如의 相이라 불려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動搖하는 마음의 相과 純粹한 마음의 相 의 두 種類가 있는 것을 大乘起信論에서는 가르치고 있다. 이 마음(一心)에는 淸淨한 一面이 있기도 하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이 마음(一心)을 體(本體)와 用(作用)으로 둘로 나누어 說示하였다. 이 衆生心에는 眞如의 體와 生滅의 用이 있다
眞如의 體란 움직임이 없어 조용한 바닷물과 같은 것을 말함이요,
生滅의 用이란 바닷물이 바람을 만나 거센 파도 가 일어 출렁이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본다. 마음(一心)이 조용한 바다같이 된 狀態 를 가르쳐 眞如門이요, 千差萬別이 일고 있는 狀態를 生滅門이라 하는 것으로 본다.
중생심, 진여의 체에 無明煩惱가 가려지면 그 즉시 生滅의 用이 발동된다는 것이다. 海東聖師로 불리 우는 원효 대사도 미모의 여성을 보는 순간 生滅門의 用體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원효에 있어서도 여성에 대하여 觀心을 가진 마음과, 觀世音菩薩을 친견 하겠다는 마음이 한 순간에 動하게 되었다 하겠다.
여성에게 관심을 가지고 慾望을 느낀 것은 生滅의 마음이 움직인 汚染된 마음이며, 관음보살의 眞身을 친견하겠다는 그 마음은 眞如의 마음, 즉 안정된 마음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여기서 다시하번 생각해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중생심은 한순간에 진여문과 생멸문으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하고 있다. 무명이 가려지면 생멸문의 온갖 번뇌가 일어나는 것으로 나타난다.
진여와 생멸은 넓은 차원에서 중생심이라 하지만, 진여의 마음은 부처님 마음이고, 생멸의 마음은 범부중생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범부중생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보니 모든 사건 사고가 비일비재 하다고 보아진다.
진여의 마음, 즉 부처님마음으로 살아가면 안락한 사회가 되리라고 본다. 일심 속에 10%~20%만이라도 부처님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행복한 나날을 영위 할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된다. 변함없는 정진으로 몸둥아리의 육근이 어떤 불교 수행정진의 인연을 맺어 진여(부처님)의 마음이 훈습 되어져 일상생활에서 좋은 습으로 살아간다면 서서히 生滅門 속의 煩惱와 사건사고가 사라지게 되어 幸福한 사회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보아진다.
佛紀 2549. 4.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