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相大師 法性偈
동산법사단 강의 2017. 9. 8 혜 일 임 원 호
4. 證智所知非餘境(증지소지비여경)
‘소지(所知)’ 알음알이,
분별지(分別知)하고 증지(證智)하여도 별다른 경계 아니다.
일체 범문을 들어 모르는 것이 없고 이를 통해 깨달음을 체득하여 ‘한 소식’했다. 하여도 현실과 동떨어진 별난 경계가 펼쳐지지는 않는다. 먼저 證智란 敎學들을 통하거나 남에게서 들은 것을 가지고 眞理를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體驗을 통해서 하는 것이다. 이를 ‘體得’했다. ‘證得’했다고 표현한다.
특히 ‘證得’이란 말은 비록 타인에게서 진리를 들었으나 스스로 체험하여 확인한다는 강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진리에 대한 가장 확실한 확인 방법은 스스로 해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체득하려면 교학적인 이해가 기본적으로 필요한데, 물론 禪宗과 敎宗은 학습 면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인다. 특히 선종은 교학을 앞세우기보다 먼저 스스로 자신의 本性 本來面目을 찾을 수 있게 지도한다.
先體驗 後 學習이다. 물론 역대 조사들을 보면 사실 대부분 교학에 있어서도 顯敎와 密敎뿐만 아니라, 이미 儒敎와 道敎의 이론 및 外道의 수행마저도 통달했던 조사들이 의외로 많이 있었다.
단박에 깨달아 頓悟頓修하는 最上根機도 있겠지만 돈오돈수이든 돈오점수이든 어쨌든 수행에 있어서는 일단 몰록 깨달았다는 뜻인 頓悟로부터 해야 한다. 돈오가 안된 상태에서는 經을 읽거나 法門을 들어도 그 뜻을 절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眼目이 없기에 經典을 풀이하여도 반쪽짜리 문자 풀이로 전락하고 만다.
옛날 이조 시대 때 금강산 에 月峯스님이 천명의 學人을 모아 <원각경>강의를 했다. 그 규모가 범상치 않기에 講主의 강의 내용이 어떠한지 모두들 궁금해 하였다. 마침 이 소문을 들은 누더기 수좌가 강의에 참석해서 법당 귀퉁이 말석에 앉아 있었다. 강주가 나와서 강의를 한참 하다가 <圓覺經>태풍의 눈이라고 할 수 있는 ‘無邊虛空 覺所顯發 이라는 대목을 해설하기 시작했다.
講主는 끝이 없는 허공에 覺(깨달음)이 드러났다고 풀이 했다. 이 때 구석에 있던 누더기 수좌가 벌떡 일어나 ’억!‘ 하고 ’할‘을 했다. 이 할 소리를 들은 월봉스님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져 죽었다.
’無邊虛空‘이 ’覺所顯發‘이라. 즉 무변한 허공이 覺에서 드러났다고 풀이해야 할 것을 강주는 ’무변허공‘에 ’각소현발‘이라. 무변허공에 각(깨달음)이 드러났다고 해석한 것이다. 경을 보는 안목이 없어져 조사하나, 토 하나를 잘못 한 바람에 주어가 뒤바뀌면서 본뜻이 완전히 顚倒되었기 때문이다.
修行과정에는 사고 작용이 原因이 되어 깨달음을 방해하는 두 가지 지적장애가 있다. 煩惱障과 所知障이다. 번뇌장은 貪(욕망), 瞋(성냄), 痴(어리석음)의 先天的 煩惱로 인한 障礙이고 所知障은 愛憎과 分別心, 主觀的 偏見, 執着으로 因하여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해 일어나는 障礙이다. 이처럼 所知(알음알이)의 장애를 넘어 證得의 단계로 들어서서 對象과 事物을 왜곡하여 보지 않는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境地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나 이처럼 깨달음에 도달했다 할지라도 ‘非餘境’이라. 즉 현상에 있어서 특출하고 신비스런 그 무엇이 환상처럼 펼쳐지지는 않는다. 는 말이다. 깨닫는다고 뭐가 있는 것처럼, 무언가 되는 것처럼, 환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見性한다고 붉은 꽃이 핍니까? 깨닫기 이전이나 깨달음 후에도 對象은 변하지 않는다.
문제는 마음(감정)이다. 一水四見이라 , 각자 중생은 자기 마음에 따라 대상을 달리 본다. 같은 물을 보고서 人間은 물을 마시는 물로 보지만, 地獄衆生인 餓鬼는 피고름으로 비추어 지며, 물고기 같은 水中 생물에게는 물이 집으로 보이고, 天上의 중생은 물이 유리보배로 보인다고 한다. 對象은 향상 그대로 이다. 다만 대상에 따라 항상 펼쳐지는 그 境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스스로의 마음가짐(알아차림)이 또렷해야 바르게 볼 수 있다. 마음이 또렷할수록 覺性(깨어있음)의 힘이 크다.
修行적 측면에서 보건데 화내고 있는 自身을 바라보면서 ‘아 내가 지금 화를 내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그것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다. 항상 자신을 바라보는 깨어있는 수행이 習慣처럼 자리 잡아야 한다.
5. 眞性甚深極微妙(진성심심극미묘)
진성은 깊고 깊어 미료함이 극치로다.
眞性은 法性이요 佛性이며 眞空이다. 이를 잘 모르는 사람은 이것을 영혼이라고 하기 도 한다. 참된 性品의 자리는 알 수 없다. 찾으려 해도 찾을 수없는 자리,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자리, 항상 움직이는 가운데 잡을 수 없는 그것이 바로 眞性이요, ‘참나’자리요, ‘大我’요, ‘本來面目’이요 ’하느님‘이다.
그것은 오랜 세월 다르게, 다양한 이름으로 불러왔다. 儒家에서는 이 자리를 明明德이라고 했다. 이미 밝은데 뭘 또 밝히는가? 대학자이셨던 탄허 스님께서는 이렇게 설명 하셨다.’산속에 금이 있는데 광부가 金을 캐야 비로소 금을 볼 수 있다. 그 금을 精製하면 순금이 된다. 순금이나 땅 속에 묻혔던 금이나 둘이 아니다.‘
德은 이미 밝으나 배우고 익혀야 비로소 明明德 이라고 한다. 이름이 다르지만 불교에서는 이름은 부처요 涅槃이라고도 부른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나타내는 말이 있는데 각각 다르게 표현된 깨달을 覺자는 本覺, 始覺, 究竟覺이다. 본각은 본래 깨달음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깨달음이 나타나면 始覺이요. 이를 통해 완성된 것을 究竟覺이라고 한다. 마치 本覺은 땅속 금이고, 始覺은 눈에 드러난 캐낸 금이며, 정제된 金을 究竟覺이라고 비유한다.
한편 老子는 <道德經>에서 不言之敎라, 뭐라 말할 수 없는 자리,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無爲, 즉 함이 없는 자리라고 달리 表現한다. 알 수 없음을 아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東洋思想의 陰陽에 따르면, 陰이 極致에 다다르면 陽이 되고, 陽이 極致에 다다르면 陰으로 變化하며, 또 動이 反復되면, 靜이 된다.
老子는 이르기를 ‘이지러지면 온전할 수 있고, 구부리면 곧을 수가 있다. 우묵하게 패이면 채워지고, 낡으면 새로워질 수 있다’고 했다. 無心은 作用인 마음을 없애면 바로 無心이다. 즉 마음이 경계에 끌리지 않는 마음이 無心이다.
“흰 눈이 펄펄 내리는 산길을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고 걸으려 하면 어찌해야 하는가?” “그냥 걸으면 된다.”
한참을 걷다가 뒤돌아보면 흰 눈에 다 덮여 있다. ‘멈춘 자리’에서 뒤돌아보면 앞뒤 모두 발자국이 없다.! 그 때가 ‘바로지금’ 이다. 너무 아파하지도 말고, 너무 힘들다고 하지도 말며, 반대로 너무 좋아할 일도 아니다. 수행자는 단지 걸어갈 뿐이다.
6. 不守自性隨緣成(불수자성수연성)
자성을 지키지 않고 인연따라 이룬다.
自性은 實體가 없다. 실체가 없다는 것은 ‘空’하다는 것이며, 공하다는 것은 緣起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自性을 唯識學에서의 아뢰야식이 아닌 제7식 말라식으로 본다면, ‘自我’ 라 할 수 있고, 현대어로는 ‘에고Ego’, 비유어로는 ‘虛空에 핀 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깨달으면 無我요 空이다. 제8식 아뢰야식이 轉換되어 大圓鏡智 이루더라도 그 性品은 空하여 實體가 없다.
諸行은 無常이요, 諸法은 無我이며, 寂靜涅槃이라, 一切法에는 ‘나’라고 할 만 한 것이 없다. 내가 없는데 ‘나’라고 규정하고 이름 지어 ‘나’를 지킨다. 이 몸은 地水火風四大가 모여서 구성되었다 일체 모든 것은 조건으로 생겨나고 因緣이 다하면 사라진다. 그렇기에 自性은 空하다. 따라서 自性이 空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조건으로 생겨난다. 그런 自性을 어찌 지킬 수 있나? 輪廻의 수레바퀴에 깔린 衆生은 단지 그 業이 다하면 壽命은 끝이 나고 죽음으로 다시 여행이 시작될 뿐이다.
千江流水 千江月 이요 萬里無雲 萬里天 이라.
천개의 강위로 천개의 달이 떴네, 푸른 하늘 멀리 구름 걷히니
만길 그대로가 푸른 하늘이로다!
천 개의 강 위에 비추인 달은 실제 달이 아니다. 강물위에 비추인 달은 우리의 肉體를 가리킨다. 그런 달그림자가 虛像이듯 肉體 또한 虛像이다. 잠시 因緣지어 왔다가 갈 뿐이다. 그런 반면 本體는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으니 不生이며 不滅이다.
禪師가 學人에게 묻는다. ‘너는 왜 태어났다고 생각하느냐?’ 학인이 대답했다. ‘本來 태어남이 없습니다.’ 선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修行의 일부는 ‘나’죽이는 작업이다. 크게 죽고 다시 한 번 태어나야 한다. 죽음은 向上一路의 관문이요. 生은 거듭나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生事는 끝없는 進化요, 진화의 종착역은 寂靜涅槃이다.
佛敎의 교리중 대표적인 말이 因緣果다. 머져 因이란 씨앗과 같은 原因을 말하며, 結果에 反한다. 因을 破字해보면 말(口)속에 큰 뜻이 이미 숨겨져 있다. 씨앗 속에 이미 내부에 나무 한그루가 들어있다. 그래서 修行者는 果보다 因을 항상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따라서 보살은 原因을 두려워야 하고 凡夫는 結果를 두려워 한다는 말이 있다.
果는 結果이며 열매다. 緣은 因緣에 따른 果를 마들어 주기 위해 중간에서 ‘얽히고 설킨 것’을 의미한다. 마치 그물망과도 같다. 씨앗을 뿌려 열매를 맺을 때 땅과 바람과 물과 공기, 햇빛이 있어야 하듯이 이 때 땅, 바람, 물, 공기. 햇빛이 바로 緣이다. 그래서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것이 苦痛이든 幸福이든 그것은 과거 내가 지은 業으로 받는 果報인 것이다.
自身의 未來가 궁금하다면 그것은 현재 내가 어떤 생각과 行動을 하는지를 살펴본다면 쉽게 알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현재의 지위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지어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行動으로 因하여 그의 地位가 決定된다고 하셨다. 이처럼 衆生界의 모든 법칙에서 제일이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도 어둡지 않은 것이 因果이다. 우리 속담에도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이야기가 이를 두고 한 말이며 , 因果의 法則은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보리달마<상행론>에서 두 번째가 수연행이다. 수연이란 따라 변하는 것을 말한다. 어떻게 모든 인연을 자연스럽게 맞이할 수 있는가? 그것은 性空緣起라. 自性이 空하기 때문에 緣起한다. 다시 말해서 空하다는 것은 걸림이 없다. 無碍하기 때문이다. 순 경계와 역 경계를 모두 받아들이는 겸허한 마음이 隨緣行이다. 그래서 一喜一悲 하지 않는다. 因緣을 따른다는 것은 한 점 조작하지 않는 無爲이다. 무위는 ‘無爲而無不爲’의 준말로서 ‘함도 없고 그러나 하지 않음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