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性偈(義湘大師)
동산 법사단 강의 2018. 8. 10 (금) 혜일 임 원 호 법사
‘법성 따라 나오는 부사의한 지혜의 말씀이어라.’
드디어 부처님께서 海印三昧에 들어 法性 바다에서 不可思議한 法을 나투시는 구나 ! ‘繁出’이란 뒤집어서 나온다는 뜻이다. 왜 뒤집어서 나올까? 衆生은 그 見解가 顚倒되었기 때문이다. 衆生見은 永遠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하며, 허상을 실상이라 생각하고. 모든 생각을 자기중심으로 색안경을 끼고 본다.
게다기 이 몸을 眞實된 자기라고 믿어 평생 아끼고 사랑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렇게 衆生見으로 세상을 보면 一切가 뒤집힌 論理와 方式으로 보인다. 그런 세상은 眞理를 대접하지도 않고, 道를 추구하는 사람을 모두 손가락질하고 천대한다.
修行중에 한 소식했을 때는 필히 默言해야 한다. 고봉스님께서도 숭산스님에게 법을 인가하시며 당부하시길 3년간 默言修行을 권하셨다. 神通이 열리면 더욱 自身을 경계해야 한다. 神通에 집착하면 나중에는 내가 신통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神通이 나를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신통경계도 과감히 버려야 한다. 淸淨道論에서 말했다.
禪定을 키우기 전에 제거해야할 열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神通에 대한 경계가 있는데 신통에 대해서 ‘나는 왜 신통이 생기지 않을까’ 하고 근심하거나 집착하는 마음을 없애라고 주문한다.
위파사나 수행자는 필이 신통을 끊어야 한다. 따라서 한 소식을 했을 때는 한 자락 깔고 앉아 오래도록 묵혀야 한다. 즉 이것이 소위 內功을 쌓는 일이다. 이것을 모르고 뭣 좀 안다고 쫑알쫑알 대며 입방정을 떨고 다니면 그 眞氣(남회근선사는 진기는 도가용어, 요가는 영능, 밀종은 영력, 유식종은 업식의 기능, 현대는 본능, 으로 분류했다.)는 다 빠져나간다. 그래서 입을 벽에 걸어두라는 말이 생겨났다. 옛 말씀에도 오히려 聰明이 사람을 그르친다. 하였으니 새겨들어야 할 일이다.
가끔 도반 중에는 切磋琢磨(절차탁마)를 핑계로 자신의 수행경지는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일방통행으로 상대의 수행 경계만을 요구하는 이도 있다. 이는 지나치게 법에 집착하여 남의공부를 훔치는 일이나 다름없다. 法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생긴 이런 일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오죽했으면 법에 대한 시샘이 극에 달해 목숨을 다 앗아가려고 했겠는가! 法을 공부함에 있어서 참으로 모순 중에 제일가는 모순이다. 그러니 眞理를 앞세워 세기의 전쟁을 치른 아픈 역사를 人類는 가지고 있지 않는가! 禪宗에서는 그런 대표적인예가 六祖 慧能 스님이셨다. 새로 入門한 무식한 나무꾼이 法統을 이었으니 기존에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광의적으로 본다면 수행자는 모두가 다 도둑이다. 석가모니 부처님 法을 훔치려고 안간힘을 쓰는 도둑들이 아니고 무엇인가!
切磋琢磨란 톱으로 ‘자르고,’ 줄로 ‘갈고’ 모양을 만들어 ‘쪼고’ 빛이 나게 ‘문지르는 것’을 말하는데, 문리적으로 옥돌을 가지고 가락지를 만드는 것을 학문에 비유한 것이다.
義湘 조사님의 발원문 중에는 無生法忍을 發하게 해달라는 聖句가 있다. 모든 마음과 뜻과 식으로 분별하는 생각을 떠났으며, 執着없음이 虛空과 같고, 모든 法에 들어가 虛空의 性品과 같은 것을 無生法忍을 얻었다고 일반적으로 풀이한다.
그런데 남회근 선생의 해석은 먼저 無生이란 본래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 것이고, 法忍이란 一切 因緣을 끊어버린 것을 말한다. 그래서 눈앞에서 일어나는 境界를 참아내는 것이 아니라 境界에 대해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忍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눈 밝은이의 玄妙한 풀이가 아닌가! 더 나아가 無生은 道家의 長生이요. 기독교의 永生이며, 老子의 <道德經>에서 나오는 徐生으로 會通하여, 일체 종교와 철학적 사상을 한 궤에 뚫어버려 모든 성전의 벽을 허물어뜨렸으니 참으로 통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不思議‘는 중생의 견해로서는 전혀 예측조차 할 수 없는 境界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부사의한 것인가? <華嚴經>佛不思議法品에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모든 부처님의 국토와 모든 부처님의 깨끗한 誓願과 모든 부처님의 종성과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심은 불가사의 하며, 또 모든 부처님의 法身과 음성과 지혜와 信力과 自在함은 不可思議하며, 또 모든 부처님의 걸림 없는 머무름과 解脫은 불가사의 하다.”
또한 일체중생의 心行을 알며 一切衆生이 심행에 물들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더러운 진흙 밭에 연꽃이 피어나고 푸른 연잎은 그 어떤 물방울에도 젖지 않아서, 물방울이 ‘또르르’하고 굴러가니. 이 또한 어떤 모습인가!
한 세상에는 딱 한분의 부처님이 나오신다.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면 정말 오로지 딱 한 분의 부처님 외에는 안 계신다. 부처란(佛) 破字하면 人과 弗이다. 즉 사람이 아니다. 그럼 월까? 사람의 경지. 즉 衆生의 境地를 넘어선 超人을 의미한다. 마음 밖에는 石佛이 있지만 마음 안에는 살아있는 부처님이 계신다. 부처님은 不生不滅이요, 不垢不淨이시며 不增不減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깨달으면 부처님을 뵐 수 있다. 달마스님께서 설하시길 直指人心 見性成佛 이라. 곧 마음이 부처라고 하셨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本自具足하기 때문이며, 自性 또한 法性이 本來 스스로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不思議하지 않으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