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性偈(義湘大師)
동산 법사단 강의 2018. 5. 11 (금) 혜일 임 원 호 법사
17 理事冥然無分別(이사명연무분별 : lī shì míng rán mú fēn bié)
‘理와 事가그윽이 조화하여 따로 분별할 것이 없으니’
理는 本質, 眞理, 理論, 眞如, 眞, 原理, 體, 眞諦, 등을 의미하고, 事는 현상, 境界, 行動, 世俗, 事件, 用, 俗諦 등을 의미한다. 먼저 전체적인 문구의 의미를 살펴보면, 理事가 각각 명백하나 서로 조화로워 分別이 없는 자리에서는 이미 菩提와 大涅槃을 만족 했다라고 볼 수 있다. 또한 ‘冥然’의 ‘그윽하여 자연스레 조화로운‘ 境地는 時間과 空間을 훌쩍 뛰어넘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생각이 뚝 끊어져버린 자리다. 그렇기에 분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펼쳐지는 세상이다.
理는 이로써만 存在할 수 없고, 事는 사로써만 존재할 수 없다. 이에 대해 <華嚴懸談>의 저자 澄觀 스님께서는 반달(半月)로서 다음과 같은 적절한 비유를 하셨다. 보름달이 이지러져 반달이 되면, 밝은 부분만(事)을 볼 수 있으나, ‘보이지 않는, 숨겨진 部分(理)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달의 밝은 부분이 드러남은 동시에 ‘어두운 부분‘ 또한 은밀히 드러냄과 같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事件이 드러남으로 원리(理)는 감춰지고, 원리(理)가 드러남에 사건(事)은 숨겨진다. 이 둘은 나눌 수 없기에 동시에 세워지며, 서로 같지 않기에 ’감춰진 것도‘ 成立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감춰진 것이니 따라서 나타남과 숨겨짐은 동일하고, 또 理와 事, 서로가 같지 않은 까닭에 둘 다 무효가 되며, 나타난 것과 숨겨진 것도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앞의 주장은 同時에 일어나며, 또한 모든 주장이 무효가 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理와 事를 조화롭게 하여야하는데, 이는 <圓覺經> 彌勒菩薩章에 의하면 理障과 事障을 없애야 한다. 理障은 바른 知見(팔정도에서 正見)을 장애하는 것으로 서 아직 智慧의 눈을 얻지 못하여 法性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思想의 장애이다. 事障은 모든 생사를 相續한다. 즉 공부의 장애를 말한다. 根本 사상은 貪欲, 성냄, 어리석음, 憍慢, 의심 다섯 가지이다. 사장을 제거하는 구체적 방법은 性愛를 끊고 넓은 의미의 탐욕도 제거해야만 한다. 소위 身體의 奇經八脈이 통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參禪 중에 신체의 즐거움이 일어나고 定을 얻는다.
반면 不調和의 世界란 이렇게 正見이 서지 않은 상태로서 衆生見으로 생활하는 삶이며, 無分別이 아닌 分別로써 煩惱 妄想 속에 사는 삶 을 말한다. 따라서 聲聞, 緣覺의 단계를 넘어 菩薩의 단계로 들어가서 理障과 事障을 제거해야 비로소 調和로움을 찾는다. 禪宗의 앙산 스님께서는 부처가 머무는 곳이 어디냐는 學人의 질문에 理와 事가 돌이 아닌 방법을 이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생각이 없는 생각으로써 도리어 신령스럽게 타오르는 無窮함을 생각하니, 생각이 다하여 根源으로 돌아오면 性의 모습이 항상 머물러 일(事)과 이치(理)가 하나가 되어 진정한 부처와 같다.”라고 하셨다.
儒家에서는 마음(心)을 性과 情의 두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性은 깨끗한 마음이나 情은 더러운 마음이다. 佛家로 말하면 性은 佛心이나 情은 衆生心이다. 따라서 앙산 스님이 말씀하신 性은 佛性을 의미한다. <圓覺經>에 의하면 分別의 근원은 貪欲으로 부터 나오며, 탐욕의 근원은 渴愛이다 갈애는 輪廻의 根本이니 이를 벗어나려면 먼저 탐욕을 끊고 갈애를 없애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愛慾자체를 버리고 끊는 것을 즐길지라도 도리어 愛慾의 근본을 도와 문득 애욕을 이제 다 끊었다고 생각을 내는 순간 결국 輪廻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 말씀은 깨달아도 깨달았다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는 無爲의 말씀이다.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增上慢이라 하고, 이런 심적 상태는 사실 깨달음의 境地에 다다르지도 못했으면서 마치 得道한 것처럼 깨달은 체하는 교만한 마음인 것이다. 그러니 <般若心經>의 가르침처럼 五蘊이 空하다는 것을 깨닫고, 따라서 그렇게 일어나는 愛慾 또한 空하다는 것을 깨우친다면 苦海를 빠쳐 나오리라.
이를 두고 禪家에서는 本來無一物을 강조하며 나아가 ‘한물건도 없다.’ 라고 하지만 그 없다는 생각마저도 없어야 비로소 證得했음을 인정한다. 다시 말하면 이렇다. 達摩西來意 라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이 무엇입니까?’ 하고 학인이 물었다. 선사가 대답하기를 ’放下着하라‘ 고 했다. 다시 학인이 말하길 ’한 물건도 가지고 온 것도 없다는데 어째서 또 내려놓으라고 하십니까?‘ 하고 따졌다. 선사가 답하길 ’한 물건도 없다고 생각한 그 생각마저도 없애야 비로소 認可해 주겠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理와 事가 조화로운 無分別’의 세계로서 理事가 혼연일체 된 眞性의 法界를 그대로 펼칠 수 있을까“ 理의 세계가 실상인 진제라면 事의 세계는 허상인 속제가 된다. 그러나 허상은 실상을 떠나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法性偈>첫 구절에 나왔던 法性圓融無二相처럼 法과 性은 事와 理로 짝을 이루며, 法과 性이 하나로 합쳐 法性 되면 本源이 되듯이, 理와 事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서로 걸림이 없이’ (理事無礙)혼연일체가 되어 眞性인 法性으로서 조화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