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性偈(義湘大師)
동산 법사단 강의 2018. 9. 14 (금) 혜일 임 원 호 법사
21 雨寶益生滿虛空(우보익생만허공 : yǔ bào yì shēng mǎn xū koōng)
‘비처럼 보배로운 생명의 말씀, 우주허공 법계에 가득하네.’
欲界, 色界, 無色界의 時間과 空間을 초월한 것이 法界이다. 이 宇宙 법계에서 비는 땅에서 솟아오른 하늘의 기운이다. 虛空이기에 비를 뿌릴 수 있고, 그런 허공을 빗줄기로 가득 채울 수 있다. 마음의 본바탕이 本來 淸淨하기에 對象이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비는 大地의 生命을 소생시키며 渴症을 풀어주는 해결사이다.
이처럼 타는 목마름으로 渴急한 衆生의 마음에 아주 귀하고 소중한 보배 비를 뿌려주는 것이 바로 經이다. 經 이란 ‘항상(常),’ ‘본받을 만한 것(法)으로서’ 지름길을 의미하다. 常, 法, 道 세 뜻이 하나로 합쳐진 글자가 바로 經이다.
그런데 글씨가 한 자도 적혀있지 않은 신비한 經이 한 권 있다, 그 경이 바로 心經이다. 마음! 이 심경을 다시 글자로 써 내려간 것이 <般若心經>이요. 般若의 智慧로 마음을 읽어 내려가 보니. 心經의 核心은 ‘以無所得故 로 드러났다.’ 이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라는 문구는 이미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다는 反語法이다. 이 대목이 <般若心經>에서 태풍의 눈이다.
<金剛經>에서 태풍의 눈은 ‘應無所主 以生其心’이며, <圓覺經>에서는 ‘無邊虛空 覺所顯發이다.
이렇게 설명해도 문제는 역시 ‘나’에게 있다. 도대체 자기가 자기를 믿지 않으니 顚倒된 衆生의 마음아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좀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비가 주룩주룩 오는데 우산도 없이 길을 걷는다.
맞은편에서 우산을 쓴 사람이 걸어오는데 우산 쓴 사람이 마침 자신에게 우산이 하나 더 있으니 쓰고 가라고 비 맞은 이 에에게 권했다. 그런데 비에 젓은 생쥐 꼴을 한 정신 나간 이 사람이 말하기를, 자신은 전혀 비를 맞지 않고 지금 길을 잘 가고 있다고 그냥 우겨댄다. 게다가 우산조차 필요 없단다.
經典에서도 이르길 상대가 법에 대해 敬畏心 없고, 게다가 法을 請하지 않는다면 絶對로 法을 펴지 말라고 하셨다. 돼지 목에 진주! 어쩌랴, 因만 심어 놓고 가던 길 다시 갈 밖에 ....
衆生은 자기 말만 한다. 相對方의 말에 귀 기울여 들을 자세가 전혀 안되어 있다. 聖人에서 聖의 갑골문자는 耳口였다고 한다. 듣고 말하는 사람, 먼저 문제를 듣고 난 다름에 해결책을 말해주는 사람이 바로 聖人인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하는 공부는 聖賢을 넘어 聖人이 되는 공부다. 들을 때 듣고 말할 때 말하며, 沈默할 때 침묵한다. 凡人으로서는 참으로 쉽지 않은 이야기다.
깨달아 무한히 확장된 마음을 보면 송곳 하나 꽃을 자리고 없었던, 밴댕이 소갈딱지보다 더 작았던 내 마음이 廣大無邊한 宇宙를 한입에 집어 삼켰다. 비로소 그렇게 宇宙와 합일이 된 그 마음을 표현한다면, 그런 宇宙 萬有는 비로자나 부처님의 세계라고 하며, 있는 그대로 보이는 자연 그대로의 세계라고 스스로 감탄하며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楞嚴經>에서는 ‘色身과 밖으로는 山河와 虛空, 大地가 모두 妙明眞心가운데 떠오른 모습임을 모른다. 고 하였다.
主人이 허드렛일를 하며 하인으로, 奴隸로 살아가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對象에 군림을 당하여 사는 人生이니 苦痛헤서 벗어날 길이 없구나! 애석하도다. 초기 경전에는 苦痛은 있어도 고통 받는 자는 없다고 하였다.
죽은 자를 살리고 눈 먼 자를 눈 뜨게 하며, 앉은뱅이와 절름발이를 일으켜 걷게 하고 病든 자를 回復시키며 건강한 자는 더욱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이 공부요. 이를 일러 益生이라 한다. 그럼 益生의 주체는 누구인가? 神도 아니요. 하나님도 아니며 부처님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