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性偈(義湘大師)
동산 법사단 강의 2018. 12. 14 (금) 혜일 임 원 호 법사
25 無緣善巧捉如意(무연선교착여의 : wú yuán shàn qiǎo zhuō rú yì)
‘인연 짓지 않는 좋은 방법으로 마음대로 잡아 쓰니 ’
無緣善巧 란 ‘因緣 짓지 않는 좋은 方便’ 으로서 無爲無不爲을 말한다. 즉 함도 없으나 하지 않음도 없다. 다시 말해서 自由自在하다. 여기서 無緣이란 인연이 되더라도 因緣 지었다는 상이 없다. 마치 고관대작을 만나 설령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 하더라도 그를 도왔다는 상이 없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 속 에는 그 일에 대한 보상심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시는 無住相布施 가 제일 수승하다. 無住相이란 상이 없다는 말이다. 이는 無緣의 婉曲한 또 다른 표현이다. 상이 없다는 표현은 無爲의 함이 없는 마음이요. 쉽게 말해서 생색을 내지 않는 거다.
色이 올라온다는 것은 내가 저 사람에게 무언가를 주었다. 베풀었다는 생각이 올라오는 마음이다. 恩惠를 베푼 것이나 반대로 원수 갈은 것을 오래도록 기억하여 마음에 품고 있는 것도 이와 같다. 恩惠 베푼 것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그런 사람을 만나면 소위 ‘恩惠 속에 칼이 있다.’ 는 옛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때가 되면 그 칼로 무엇인가를 요구 할 것이다.
공직자의 淸廉함을 강조하고, 사업상 거래에서 선물과 뇌물이 오고 가며, 사치스러운 접대를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만일 恩惠를 받으면 빨리 갚아 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나 최 상책은 받아도 받았다는 相 역시 없다면, 받았다는 불편함을 유발하는 煩惱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다. 그래서 布施者, 供養物, 受惠者 삼위가 共하여 平等함을 잊지 않는 것이 最高의 布施法이다.
無住相布施를 연습하는 데 제일 좋은 방법은 自信과 因緣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돕는 거다. 나와 아무런 인연이 없는 고아원, 양로원, 병원 또는 걸인 등 無作爲의 對象을 無意識的으로 만나는 것도 방법이다. 이유는 내가 그들에게 恩惠를 베풀었을 지라도 다시금 은혜를 보상받을 기회가 전혀 없기에 그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줄어들거나 또는 전혀 들지 않기 때문이다.
자주 거론되는 ‘오직 모를 뿐’의 話頭는 主客이 사라진 상태로 있지만, 이제는 主客이 사라진 상태에서 베푸는 자와 은혜를 받은 자, 그리고 供養物 의 三位가 모두 平等함을 잊지 않고 ‘오직 할 뿐’ 으로 전환 되어야 한다. 그 때 은혜를 베푸는 자는 사라지고 오직 은혜를 베푸는 行爲만이 남아 있게 된다. 생색이 사라지는 순간 나도(마음도)따라 사라진다. 생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굳이 좌정하여 禪定에 들지 않아도 생활 속에서 禪에 들어 無我를 體得하는 황홀한 순간이다. 一日一善의 利益이 여기에서 證明된다. 善巧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그 소질에 띠라 교묘한 수단과 방법으로 설한 가르침을 이른다. 다시 말해서 방편을 쓰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方便을 쓰려면 방편을 쓸 자격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언급한 ‘捉如意(착여의)’즉 如意珠를 자유자재하게 쓸 줄 아는, 소위 운전면허 증 같은 ‘보살(菩薩)라이세스’ 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같은 方便을 써도 중생이 쓰면 아부고 아첨이지만, 菩薩이 쓰면 同事攝이다. 요새 우스갯소리로 남이하면 不倫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소리가 아니다. 이런 종류의 말은 衆生心에서 비롯된 말이다. 중생은 자신의 행위나 의도에 대해 ‘共感’을 유도 하지만 보살은 ‘共覺(공각)’으로 이끈다.
菩薩과 衆生의 차이가 이렇게 확연하다. 대중은 언제나 感動 받기를 원하지만 감동은 순간이다. 깨어있는 대중은 感動이 아니라 覺動해야 한다. 스스로 깨달아 동질화 되는 것, 이것이 다른 종교의 가르침과 확연이 다른 점이다. ‘끌려가면서’ 행동하는 것은 無明이고, ‘선택해서’하는 행위는 깨어있음이다. ‘어쩔 수 없이’ 하는 행동은 노예 생활이지만 ‘알면서도 속아주는 것’ 은 主人公이 하는 일이다.
반면 方便이라는 허울 속에 本質을 외면한 채 잡스러운 것들로 혹세무민하는 종교 지도자들도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마음공부가 먼저다.
깨달음 후에 行爲가 眞實 된 것이며, 조작되지 않고 자동적으로 바라밀이 行해지기 까지는 보림도 잘 해야 한다. 깨닫지도 못했으면서 폼만 잔뜩 잡고, 衆生제도에 方便을 쓴다는 미명 아래 마구니 짓을 일삼는 자가 주변에 생각보다 의외로 많다.
照顧脚下(조고각하)! 먼저 자신의 발아래를 잘 살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