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 동산법사단 혜일 헐방

경전강의

wonho lim(혜일) 2019. 3. 5. 16:04

                                

                                   法性偈(義湘大師)

                                                                               동산 법사단 강의 2019. 2.   8   () 惠日 임 원 호 법사

 

27 以陀羅尼無盡寶(이타라니무진보: yǐ tuó luó ní wú jìn bǎo)

이 다라니 무진 법문 한량없는 보배로세


老子께서 지으신 <道德經> 첫 구절이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이라. 라고 하는 순간 그 는 진정코 불변의 眞理가 아니며, 이름을 지어 부르는 순간 그것은 순수하게 그 자체를 의미하는 이름이 아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말이 말을 들어서 뜻을 햇 갈리게 하니 奧妙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일게 術士의 말장난에 불과한 말인가 ?

 

이를 唯識學에 빗대어 생각해보자, 앞서 비유했던 一水四見을 상기시켜 보자. 對象인 물을 보고, 보는 主體에 따라 물을 다 달리 본다. 人間은 마시는 물, 아귀는 피고름, 물고기는 자신의 집, 天人은 유리보석으로 본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길까? 보는 主體의 상황에 따라, 因緣 따라 달리 보인다는 것이다. 즉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對象이 변한다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絶對的 대상이란 存在하지 않으며 각자의 인식 주간에 따라 대상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禪家에서는 말을 하면 가 아니다. 라고 한다. 그러므로 생겨난 말이 言語道斷이다. 이는 말이 끊어진 자리를 보게 하기 위함이다. 心行處滅 이라言語道斷   心行處滅 은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대지도론에서 나오는 말씀인데  모든 언어의 표현이 끊어지고(言語道斷) 마음으로 행할 바가 모두 사라진 곳에(心行處滅)  이르러야만 이것이 마침내 제법실상을 다 아는 것이라고 한다. (마음의 작용이 미치지 못하는 경지, 마음작용이 소멸한 상태, 분별이나 망상이 (心行) 끊어진 상태(處滅)


말이란 생각이 움직인 것이고, 움직인 에 반에, 入定이 제대로 되기 전 까지는 經典도 못 보게 한다. 이때 나온 말이 不立文字이다. 그러나 불립문자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不立文字란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고 하여 무조건 글을 읽히지 않고 經典 공부를 시키지 않는 것이 아니다. 見性後 에는 꼭 敎學을 권하였다. 見性 전의 學習이란 지식을 쌓아 어렴풋이 추측하고 미루어 짐작함으로써 자신이 마치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이기 때문이다.

 

숲속에 이 마땅히 사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 자리를 눈치 빠른 여우새끼가 차지하게 되는 이치다. 줄 없는 거문고인 沒絃琴을 켤 줄고 모르면서 주워들은 것은 많아서 시끄럽고 잡스런 거문고 소리를 주등이로 마구 뱉어낸다.

 

西山大師님께서는 주장자가 없는 자에게는 주장자를 빼앗을 것이요. 주장자가 있는 자에게는 나의 주장자를 허락하노라! 하셨습니다. ?

 

28 莊嚴法界實寶殿(장엄법계실보전 : zhuāng yán fǎ jiè shí bǎo diàn)

온 우주 법계를 장엄하여 보배궁전 이루네

 

圓融無碍한 사유방법을 제시한 <華嚴經>은 신라의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에 의해 일본에 까지 그 완연한 빛을 발하게 되었다. 義湘스님은 깨달음의 세계를 자신의 목소리로 表現해보라고 요구한다. 法性偈210자도 그저 隨緣으로 이루어진 것일 뿐, 義湘大師가 한 자도 설하기 전의 소식을 일러 보라고 다그친다.

결국 眞理란 언어를 넘어서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現實理想이 조화롭게 合一되는 相卽相入華嚴 사상은 또한 現實은 현실대로, 理想은 이상대로 펼쳐지기도 한다.

 

風水에서 무엇의 洞天이라고 땅의 地名이 붙는 경우가 있다. 이때 洞天意味는 그 땅은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은 기운을 지닌 형국의 땅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지역이 蓮花洞天이라면 그 땅은 하늘의 蓮花洞天과 똑 같은 기운을 지니고 있다.


基督敎主祈禱文에서는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대목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그렇다면 現實世界俗世에서 佛敎的 이상향의 건설은 하늘의 極樂寶殿莊嚴하는 것(實寶殿)과 다름이 없다. 개별적 수행으로 無明에서 벗어나 法性의 자리에 들어가며, 보림을 통해 바라밀을 함이 一面 또한 法界莊嚴하는 行爲이다.

 

華嚴經 十地品 에서는 십바라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의 智慧를 구하며, 衆生에게 廻向하는 일, 이것이 布施바라밀이다. 煩惱의 불꽃을 끄는 일, 이것이 持戒 바라밀이다. 慈悲한 마음으로 중생에 대해 참는 일, 이것이 忍辱바라밀이다. 을 쉬지 않고 닦는 일, 이것이 精進바라밀이다. 전지자의 智慧를 실현코자 어지러움이 없는 도를 가르치는 일. 이것이 禪定바라밀이다. 모든 것이 본래 不生임을 아는 일, 이것이 智慧바라밀이다. 헤아릴 수 없는 智慧를 완성하는 일 , 이것이 方便바라밀이다. 훌륭한 지혜를 얻으려는 을 세우는 일, 이것이 바라밀이다. 외도의 논설과 惡魔에 의해 도가 끊이지 않는 일, 이것이 바라밀이다. 모든 것에 대해 있는 그대로 智慧를 내는 일, 이것이 바라밀이다.

 

그럼 法界는 누가 莊嚴할까? 바로 菩薩이다. <華嚴經> 명법품에서 보살은 중생의 취향에 따라 가르침을 설한다. 탐욕이 많은 이에게는 貪欲을 버리라고 하고, 성내는 이 에게는 평등한 관찰을 가르치며,,,,,, 등등 大乘하는 이에게는 불도의 莊嚴을 가르친다고 되어 있다. 보살은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 方便을 구사하여 衆生을 위한 보물창고를 열어주는 데 전혀 피곤함이 없다. 法界의 보물창고를 열어 중생에게 쏟아 붙는 菩薩의 이런 행위가 法界를 장엄하는 것이며, 極樂寶殿을 보배로 치장하여 가득 채우는 행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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