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性偈(義湘大師)
동산 법사단 강의 2019. 3. 8 (금) 惠日 임 원 호 법사
29 窮坐實際中道床(궁좌실제중도상: qióng zuò shi ji zhōng dào chuáng)
‘법성의 무궁한 자리, 중도의 자리에 앉았으니’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29세에 出家하기 전 王宮에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快樂에도 젖어보고 35세에 깨달음을 얻기까지 6년간의 苦行도 해 보았다. 그러나 이런 樂行도 苦行도 인생의 문제를 푸는 참된 해결책이 아님을 아시고 깨달은 것이 바로 中道였다. 이것을 깨닫고 처음 다섯 제자에게 傳法하여 가르치신 것은 양 極端의 見解에 치우치지 말고 八正道의 修行으로써 이를 실천해 나아가야 한다는 ‘苦樂中道’였다. 이처럼 中道란 치우치지 않는 바른 道理를 말한다.
치우지지 말라는 것은 양 極端에 집착하지 말라는 意味이다. 中道의 中이란 엄격히 말해서 중간을 뜻하는 말도 아니다. 만일 ‘가운데 다’ 라고 주장한다면 순간 ‘가운데 아닌 것’과 極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도라는 진리는 이미 자체적으로도 對立的 槪念을 벗어나 정의를 내포하고 있다.
초기 苦樂으로 시작한 中道의 槪念的 범위는 생멸, 단상, 일이 쾌거 등으로 다양하게 확장되어 간다. 이 여덟 가지 잘못된 견해(生滅, 斷常, 一異, 去來)를 떠나서 無所得 (얻을 바가 없는)의 바른 見解에 머무는 것을 ‘八不中道’ 라고 한다. 그러니 不生不滅이요 不斷不常이며, 不一不異요 不去不來이다. 이와 같이 空, 有 에 구애받지 않는 無得正觀에 있는 것이 中道이다.
無得의 意味는 어떠한 견해를 취하지 않는다. 따라서 버리거나 취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바로 禪이요 <般若心經>의 核心인 以無所得故(얻을 바가 없는 까닭에 )가 바로 中道를 나타내는 말이다.
있다는 것은 없다는 것을 전재로 存在한다. 緣起의 법칙이 이러하다. 그러나 있다고 있는 것이 아니며, 없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있지 않는 것도 아니며 없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兩極端을 벗어나면 있는 것은 있는 대로 없는 것은 없는 대로, 없는 것은 없는 대로 조화롭게 共存할 때 서로가 빛난다. 이때가 바로 中道이다.
天台宗의 지의 스님은 <중론>에 의거하여 空 · 假 · 中 으로 설하셨다. 간략하게 정의 하자면, 모든 존재는 自性 이 없다는 眞諦로서 의 空,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에 실체의 객관은 없다는 俗諦로서의 假, 空에도 假에도 치우치지 않는 非有非空의 眞理로서의 中이다. 眞과 俗은 空과 假로서 이 둘을 會通시키는 것이 中이다. 이런 논리는 결국 모든 법, 諸法의 실상은 中道에 있음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이렇게 中道의 개념은 無窮無限 하기에 ‘窮坐’라는 단어에서 窮은 無窮無盡한 窮의 의미로 사용했다 무한한 宇宙를 다 덮고도 남음이 있는 넓이의 자리가 中道의 자리요. 높이로는 가장 높아 더 이상 다다를 수 없는 높이의 자리가 中道의 자리다.
그러한 깨달음을 얻어 宇宙法界의 가장 높고 넓은 자리에 않으신 분이 바로 양보해주시는 분이기도 하다. 實際란 法性에 의해 있는 그대로 드러난 現實世界를 말하며, 있는 그대로 드러난 현실 세계는 法性과 둘이 아니다.
이는 現實과 理想, 두 양변을 동시에 아우르는 觀念的 범위를 뜻하기도 한다. 一切法은 世俗에서는 無가 아니라 有이며, 勝義에서는 有가 아니라 無이다. 따라서 中道床이라는 의미는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친 것이 아니라, 中道는 有에서도 실재이고 無에서도 실제이며, 現實世界에서도 중도는 通하고 理想世界에서도 通한다는 뜻이다. 兩極端은 언제나 中道의 든든한 상위에 있다. 그래서 중도로 인하여 양극단이 성립하고 相互 조화로울 수 있다.
窮坐實際中道床을 하나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法性의 무궁한 자리는 이미 廣闊한 宇宙를 떠받치고 있으며 (實際), 중도가 상으로써 받쳐주는 양극단인 世俗과 法性은 동시에 共存하며(中道床), ‘眞如에 의해있는 그대로 드러난 宇宙 參羅萬像’은 法性과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無相이 實相임을 證得하여 宇宙法界의 텅 빈 충만함으로 現實을 살아가야 하겠다.
어느 선사님의 물음에 ‘이 늙고 오래된 큰 나무의 가지가 꼬불꼬불한데 어떡하면 이 꼬불꼬불한 나무 가지를 바로 볼 수 있겠니?’ 이 질문은 대부분 사람들이 ‘바로 볼 수’라는 말과 ‘꼬불꼬불’이라는 말을 대립적 구도로서 無意識的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그냥 꼬불꼬불하게 보는 것이 바로 보는 것입니다.’ 라고 즉시 答을 못한다.
생각이 일어난 자리에서, 즉 자신의 치우친 見解, 先入見에서 판단하면 모두 다 그 답은 오답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 바로 中道의 자리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 ‘생각하지 마라’로 선사님들은 말씀하신다. 생각이 끊어진 곳에서 對象을 바라보면 그 순간 이미 중도의 자리(中道床)에 앉아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