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에 찬 새로운 해가 밝았습니다.
임인(壬寅)년 새해는 모두가 건강하시고 행복한 시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혜일 두 손 모음
요즘은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으로 너무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복잡하고 힘들수록 순수한 마음으로 차분하게 생각하시고 현시대의 흐름이라고 보고 순리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주변사람들과 서로를 양보하고 이해하는 착한마음으로 주어진 일에 묵묵히 매진하다보면 복잡한 시간이 지나가리라고 확신합니다. 단지 주의해야 할 점은 착하게 살아가되(비상식적인 사악한 사귀집단이 활동하고 있음) 아주 현명하고 똑똑히 보아야 합니다.
“주역(周易)곤괘(坤卦) 문언전(文言傳)에 적선지가 필우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적불선지가 필유여앙(積不善之家 必有餘殃)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선(善)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남아넘치는 경사(慶事)스러운 일이 있다. 와 선을 쌓지 않는 집안에는 반드시 남아넘치는 재앙(災殃)이 온 다.”는 뜻입니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서 공자님은 착한 일을 하는 자에게는 하늘이 복(福)으로써 이에 보답하고 악한 일을 하는 자에게는 하늘이 재앙(災殃)으로써 보답한다,(子曰 爲善者 天報之以福 爲不善者 天報之以禍)”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칠불통계게(七佛通戒揭)는 제악막자(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등등 유· 불 · 선(儒彿仙)을 비롯한 모든 종교에서는 잘 살려면 선행(善行)을 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물(萬物)의 령장(靈長)인 인간, 인간의 삶 속에서 선(善)을 행해야 하고, 행(行)하면 하늘이 복(福)을 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보시(布施)하면 선행(善行)을 했다고 합니다. 특히 스님들께 보시하거나 절에 보시하면 크나큰 복덕(福德)을 지었다고 합니다. 종교에서 선행(善行)을 하거나 보시를 하면 복덕을 쌓는다고 한 것은 정확하게 맞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종교에서는 정부가 미치지 못하는 사회 곳곳(불우이웃 도와주기 등등)에 참여하다보니, 여러 곳, 여러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하게 되니까 많은 복덕을 지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종교단체(宗敎團體)나 성직자(聖職者), 종교인 들을 사회에서 우러러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福)을 받아서 편안한 마음으로 건강하게 사회에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간다고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성직자가 성직자답지 못하게 생활하거나, 종교인이 종교 인 답게 생활하지 못한다면 비종교인 보다 현재 삶도 잘 풀리지 않을 뿐더러,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먼저 떨어진다고 합니다. 모두가 깊이 명심(銘心) 해야할 대목입니다
여기서 운곡선사(雲谷禪師 1500-1575)님에 참된 선(善)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참고로 올립니다.
“남에 이로운 것이 선(善)이고 자신(自身)에 이로운 것은 악(惡)이다. 남에게 이로우면 남을 때리고 남을 욕하는 것도 모두 선(善)이고, 자기(自己)에게 이로우면 남을 공경(恭敬)하고 예를 갖추는 것도 모두 악(惡)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사람이 선(善)을 행할 때에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공(公)이고 공(公)이면 참(眞)이며, 자기를 위하는 것은 사(私)이고 사(私)이면 가짜(假)다.
또 마음에다 뿌리를 두는 것이 참이고, 겉으로 형식과 모양만 내는 것은 가짜다. 그리고 무위(無爲)로 자연스럽게 행(行)하는 것이 참이고 유위(有爲)로 억지스럽게 하는 것은 가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스스로 잘 살펴야 한다.”라고 합니다.
천지신명(天地神明)이 선(善)에 복(福)을 주고 음란(淫亂)한 일에 화(禍)를 내리는 일은, 모두 성인(聖人)과 똑같은 시비선악(是非善惡)의 판단 기준에 따르며, 세속(世俗)의 취사선택(取捨選擇)과는 결코 함께 하지 않는다.
따라서 적선(積善)을 하려는 자는, 결코 세속의 이목(耳目)을 좆아서는 안 되고, 오직 마음의 근원(根源), 은밀(隱密)한 곳으로부터 묵묵히 행해야 한다. 고 하셨습니다.
불교 공부하는 과정에서 경계(境界)에 집착(執着)하지 말라고 하는 말을 많이 합니다. 마찬가지로 선행(善行)을 하면서 마음이 그 선(善)에 집착하지 않으면 곧 각자가 성취(成就)하는 바에 따라 모든 것이 원만(圓滿)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기도(祈禱)하는 자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각자의 마음이 선행을 했다는 생각, 보시를 했다는 생각에 집착하면 비록 종신(終身)토록 힘써 부지런히 행할 지라도 끝내 절반짜리 선(善)이나 보시(布施)에 머물고 만다는 것입니다.
안으로는 자기(自己)를 보지 않고, 밖으로는 남을 보지 않으며, 가운데로는 나와 남 사이를 매개하는 보시(布施)하는 재물(財物)조차 보지 않아야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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