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량원겁 즉일념(無量遠劫 卽一念)"
이 문장은 의상(義湘) 대사님의 법성게(法性偈)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간단하게 글자를 풀이하면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한 생각이요’ 라고 풀이합니다만 정말로 난해합니다.
시간이라 함은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말이 됩니다. 하는 일이 재미있으면 언제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갔느냐는 식으로 짧다고 느끼고, 반대로 지루한 일을 하면 왜 시간이 안가냐고 푸념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시간은 재미있을 때나, 지루했을 때나, 똑같은 시간을 소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차이를 느낍니다.
같은 지역이라 할지라도 높은 곳에 사는 사람과 낮은 곳에 사는 사람의 시간이 다르고, 멈추어 있는 사람과 움직이는 사람의 시간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모든 중생은 저마다 자기의 시간에 띠라 살고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ktx 열차를 타고 부산을 가는데 창밖으로 주위환경이 쏜살같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더니 약 2시간 30분 만에 부산에 도찰 했을 때, 참 빠르게 왔다고 생각하고 말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이 관악산 등산을 하는데 이곳저곳 아름다운 자연화경을 만끽하면서 정상에 도착했는데 3시간이 걸렸다고 할 경우, 많은 시간을 소비하며 늦게 정상에 올라 왔다고 생각하고 말을 하게 됩니다. 시간이 느리거나 빠르거나 의 느낌을 갖게 한 것도 주위 환경이 한 몫을 도와줍니다.
여기서도 시간은 빠르거나 느리게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는데, 자기가 처에 있는 위치에 따라서 빠르다고 혹은 느리다고 말을 합니다. 바로 이런 현상을 보고 “관찰자 절대 보존의 법측(觀察者 絶對 保存의 法則)”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관찰자(觀察者) 한 사람을 위해 우주(宇宙)는 존재(存在)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각자가 서로가 관찰자이며 관찰하는 입장에서 그렇게 보이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주 만물의 존재는 하나하나가 서로를 위하기 때문에 다 소중한 것 이라고 말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중생들 자체가 우주(宇宙)이며 실존(實存)이라 하겠습니다. 때문에 삼라만상(森羅萬象) 그 자체인 것입니다.
어찌 보면 사람의 숨결하나에도 우주는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보면 조물주인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찰자는 시간과 공간을 관찰(觀察) 도구로 삼고 대상의 일부를 실감나게 감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시간(時間)의 결정은 우주의 모든 존재(存在)들 간의 관계(關係)에 의존(依存)하기 때문에 한 중생의 시간이 결정되려면 우주(宇宙)의 모든 존재(存在)들의 시간이 원인(原因)이 되어야 합니다. 곧 서로 다른 시간의 요소가 한 사람에게 그 사람의 시간이 되게 합니다.
이런 관계에서 본다면 한사람의 시간 속에는 우주의 모든 다른 시간이 들어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량없는 존재들의 한량없는 시간이 한사람의 시간을 위해 존재하고 또 이 한사람의 시간도 한량없는 사람들의 시간이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시간은 움직임을 나타내는 잣대가 되기 때문에 한사람의 움직임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사물(事物)과 중생(衆生)들의 움직임의 원인(原因)이 되고, 거꾸로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중생과 사물들의 움직임이 한사람의 움직임을 위한 원인이 됩니다.
아울러 과거(過去)와의 끝없는 시간(時間)은 한 순간(瞬間), 곧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一念:일념)을 원인(原因)으로 존재(存在)합니다. 바로 “무량원겁 즉일념(無量遠劫 卽一念)” 입니다.
한없는 시간이 한 순간의 변화(變化)일 뿐입니다. 그것은 시간도 하나의 법(法)이고 법은 공성(空性)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시간이면서 오히려 시간 밖에 존재하여 모든 순간의 시간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끝없는 시간과 한 순간의 시간이 공성(空性)으로 아무런 다름이 없는데서 현재의 한 순간이 됩니다,
시간(時間)의 속성이 이와 같기 때문에 좀 어려운 이야기지만, 삼매(三昧)로 사는 사람, 곧 시공(時空)의 제한을 넘어선 사람은 현재의 한 순간을 철저히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삼세(三世)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살고 있습니다.
아울러 한 공간(空間)을 차지하고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온 우주(宇宙)를 넘나들며 살고 있습니다. 수행(修行)으로 부동심(不動心)이 될 때, 공(空)의 자성(自性)을 밝게 알아 제한 된 시공(時空)을 넘어 한 법계(法界)의 세계에서 살 때, 한 발자국도 옮기지 않고 삼계(三界)를 넘나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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