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 동산법사단 혜일 헐방

무위(無爲) 란?

wonho lim(혜일) 2021. 6. 21. 16:47

 

무위(無爲)란?

함이 없다는 말, 게으름 피우며 노는 것이 아닙니다. 노자(老子)의 사상에 무위자연(無爲自然)과 도법 자연(道法自然)이란(道法自然) 말이 있습니다. 노자에게는 무()는 곧 도()입니다. 바로 도는 자연입니다.(道法自然)

 

그러므로 무위(無爲)는 곧 도위(道爲)입니다. 경계(境界)에 걸린 범부의 욕심에 따라 하는 것이(有爲 : 함이 있는) 아니라, 동시에 깨우친 사람은 (그냥 하는 일)에 따라 하는 것입니다. 무위(無爲:도는 함이 없는)는 곧, 늘 하지 않는 게 없습니다.(道常無爲 而無不爲) 늘 하지 않는 것이 없으면, 늘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기는 하는데 함이 없이 한다는 말이 됩니다.

 

()는 무소부재(無所不在)며 무소불위(無所不爲)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도는 있지 않은 곳이 없으며, 하지 않는 곳도 없다는 뜻입니다. 결국에는 도()는 어느 곳이든 다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함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착()에 걸려 도(道)인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위()란 글자를 파자 풀이를 해봅니다. ()의 글자란 손톱 조(爪) 아래 원숭이를 그린 상형문자(象形文字)입니다. 새끼 원숭이의 손톱이 어미 원숭이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어미 원숭이의 등을 할퀴는 그림 글자입니다. 그러므로 위()는 욕망에 따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위(無爲)는 개인 생각이나 욕망(慾望)에 따라 하지 않고 (깨달음의 진리(眞理) 순수하게 그냥 하는 것입니다.

 

진리(眞理), 에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말에는 함정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마음공부에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경허 스님의 구도 행각에 대하여 쓴 책, ‘길 없는 길(저자 최인호)이란 제목이 있습니다. 길 없는 길은 깨달음의 자리이며 언어(言語)가 끊어진 자리입니다. 바로 언어도단입니다. 생각의 한계니(함의 생각이 없는), 대자유인이니, 하는 이 말을 하는 자체가 있으면 즉, 흔적(痕迹)이 있으면, 이미 길 없는 길이 아닙니다. 이 대목에서도 말(생각)의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불교용어의 문자에서도, 조사 스님의 말씀, 문자(文字)에서도 마찬가지, 이 모두는 깨달음으로 가는 수단으로 알고, 그 뜻의 내용을 잘 활용하여야 합니다. 혹자는 경전 구절이나 조사어록을 줄줄 암송하는 것을 자랑하고(경전이나 문자에 만 매달림), 또는 좋은 일을 하고서 어디에 가서 무슨 일을 했다고 자랑하는 등, 마치 깨달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예도 있습니다. 이는 모두 다 말의 함정에 빠져서 본질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더는 공부를 해야 하는데, 알음아리로 쌓는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布施)하라고(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말은 하지만, 내가 어디에다 얼마를 보시(布施)했다고 자랑하는 말이나, 어느 우리 큰스님을 친견했다는 말이나, 무위(無爲)에 어긋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진실 되게 공부하는 차원에서 보면 정말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무위라는 것을 잘 이해한다고 하면 깨달음에 쉽게 다가갈 수 있다고 보아집니다. 함이 없이 함이라는 말은 어떠한 식()에도 걸리지 않는 즉, 어떤 경계(境界)에도 걸리지 않고 순수한 평상심(平常心)으로 한다는 말씀이 됩니다.

 

함이 없이 함한 것을 무위법(無爲法)이라 하고, 함이 있어 하는 것을 유위법(有爲法)이라고 합니다.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하여 예를 들어 이야기해 보자면 큰스님과 사미승이 길을 나서 큰 개울을 지나게 되었는데, 비가 내려 징검다리가 물에 잠겨 신발을 벗고 건너야 할 사항이 되었습니다. 이때 젊은 여인이 신발과 버선을 벗고 건너야 되는데 여건이 어려워지자 큰스님께서 숙녀를 등에 업고 건너 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미승과 길을 가다가 어느 고개 길에서 쉬게 되는데, 사미승이 질문을 합니다. 큰스님! 스님은 여자를 멀리 해야 되는데 여자를 업고 건너 주었느냐고 말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큰스님은 이놈아! 너는 아직도 등에 그 여자를 업고 있느냐? 하며 나무라십니다.

 

여기서 업고 건넜다고 말하는 것은 유위법(有爲法)이고, 건너 주었지만 건너 준 사실을 함이 없음은 무위법(無爲法)이 됩니다, 그러나 스님은 그냥 무위니, 유위니 생각 없이 그냥 개울을 건너 주었을 뿐입니다. 어찌 되었던 건너 준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는 무위(無爲), 유위(有爲)니 분별을 하지만 결국은 하나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삶 속에서 함은 늘 그냥 하는 것입니다. 함의 경계(境界)에 걸리지 않는, 즉 평상심(平常心)에서 함이냐? 경계에 걸려서 함이냐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결론(結論)은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 바로 중도(中道)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중도로 보면 유위(有爲)에서도 실제이고, 무위(無爲)에서도 실제이며, 현실세계(現實世界)에서도 통()하고, 이상세계(理想世界)에서도 통()한다는 뜻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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