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마음
마음이 있다고 할까요, 없다고 할까요?
있다고 하면, 가져와 보아라. 하면 만질 수도 없고, 어떤 덩어리(相)로 혹은 물체(物體)로 가져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생각)을 가지고 생각에 따라 행동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바로 이럴 때,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을 하게 합니다. 정말로 비어 있어 없는데(眞空), 묘하게 작용(作用)을 하여 나타나 있습니다.(妙有)
마음은 보이지도 않고 없는데, 없다가도 마음을 내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어떤 경계나 상황을 먹고 산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 하면 한 가지 마음일 텐데, 왜 두 가지 마음이라고 할까 생각하게 합니다. 여기서 대승기신론에 일심이문(一心二門)을 살펴봅니다.
마명보살(馬鳴菩薩)이 저술한 대승경전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살펴보면 일심이문(一心 二門), 한마음에 두 가지 문을 강조합니다. 일심(一心)이란 물(物)과 심(心), 자기(自己)와 세계의 두두만물(頭頭萬物)이 생긴 그대로가 근원(根源)이 되는 것인지라 중생심(衆生心)이라 합니다. 중생심이란 대승(大乘)의 근본바탕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마음(一心)에 이문(二門)이란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이 있는데, 번뇌 무명(煩惱 無明)에 오염(汚染)되지 않고 청정(淸淨)한 상태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진여문(眞如門)입니다. 원래 마음이라는 말 자체도 필요 없는 아주 맑고 맑은 청정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 진여문(眞如門) 입니다.
청정한 마음, 진여문과의 반대되는 번뇌망상(煩惱妄想)의 작용에 기동유전(起動流轉)해 가는 것이 생멸문(生滅門) 입니다. 다시 말하면 잡다한 생각들이 매순간마다 일어나고 없어지는 반복되는 마음이 생멸문(生滅門) 이라는 것입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진여문을 체(體)로 보고 생멸문을 용(用)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체(體)에서 용(用)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진여(眞如)의 체(體)란 움직임이 없어 조용한 바닷물과 같은 것을 말함이요 생멸(生滅)의 용(用)이란 바닷물이 바람을 만나 거센 피도가 일어 출렁이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一心)이 조용한 바다와 같이 된 상태를 가르쳐 진여문(眞如門)이라 하고 천차만별(千差萬別)이 일고 있는 파도와 같은 상태를 생멸문(生滅門)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심불급중생 삼무차별(心佛及衆生 三無差別), 마음과 부처님과 중생과는 차별이 없는데(일심), 일심(一心)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부처와 중생으로 나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 같은 마음을 쓰면 부처님이 되고(진여문:眞如門), 중생(衆生)같은 번뇌망상(煩惱妄想)의 마음을 쓰면 중생이 됩니다.(생멸문:生滅門) 그러므로 두 가지 마음의 문으로 말씀하신 것이 됩니다.
여기서 락산사 홍련암에 얽힌 사연을 참고해보겠습니다.(삼국유사 권3)
양양의 락산사(落山寺)에는 큰 관음보살(觀音菩薩)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해안절벽의 의상대(義湘臺)에 가면 동해바다의 파도가 한눈에 펼쳐집니다. 이 아름다운 곳의 락산사에는 의상과 원요대사에 얽힌 전설을 보면 해수가 분주히 드나들고 있는 동굴위의 홍련암에 의상(義湘)앞에 강현(降現)하신 관세음보살이 봉안(奉安)되어 있습니다. 의상은 여기에서 관세음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할 수 있었으나 원효(元曉)는 관음의 진신을 볼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파계(破戒)한 원효(元曉)가 여성을 희롱하였기 때문이라 합니다. 원효는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러 이곳에 오게 되었는데, 락산 남쪽 논(畓:논답)길을 지날 무렵 흰옷을 입은 한 여인이 논 가운데서 벼를 베고 있었습니다. 원효는 농담 섞인 말투로 벼이삭을 하나 나에게 줄 수 없느냐고 하였습니다. 여인은 웃으면서 잘 영근 벼대신 말라버린 쭉정이 벼를 원효에게 주었습니다.
원효는 쭉정이 벼이삭을 들고 걸어가는데 다리가 있었습니다. 다리 밑 시냇물 에서는 한 여인이 경수(經水:월경)로 더러워진 내의를 세탁하고 있었습니다. 갈증을 느낀 원효(元曉)는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세탁하여 더러워진 물을 떠서 원효에게 올렸습니다. 원효는 너무나 더러운 물이라 버리고 자기가 손수 깨끗한 물을 마셨던 것입니다.
그 때 들판 소나무위에 푸른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습니다. 원효를 향하여 거룩한 화상이어 실없는 짓은 하지 마시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새는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소나무 밑에는 짚신 한 짝만 놓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원효는 마침내 락산사에 도착하였습니다. 관음보살이 봉안되어 있는 좌대 밑에는 소나무 밑에서 본 짚신과 똑같은 짚신이 있었습니다. 이에 원효는 할연(轄然)이 깨달았다고 합니다.
앞에 만났던 벼를 베든 여인이나, 빨래하던 여인이 모두가 관세음보살의 화신(化身)이었던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원효가 해안 동굴에 들어가 관음보살의 진여상을 뵈옵고자 하였으나 풍랑이 일어 동굴에 들어가지 못하고 마침내 포기하게 됩니다.(지금은 홍련암의 각이 있지만 그 당시는 동굴만 있었음)
원효가 공양받은 오수(汚水)를 마시고 쭉정이 벼이삭을 감사히 받아 정대(正戴)했던들 관음보살은 그 진용(眞容)을 현신(顯身)했을 것이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원효의 마음에 한 순간 미(迷) 했다는 것은 미모의 여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의 한 순간 동요(動搖)함이 생멸(生滅)인연의 상(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음의 진신(眞身)을 친견(親見)하고자 락산사 까지 온 원효의 이 마음은 어디 까지나 종교적인 깨끗한 진여(眞如)심의 마음이었습니다. 이 청정(淸淨)한 상태의 마음을 진여의 상(相)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효는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하러 올 때의 마음은 진여심(眞如心)으로 왔는데 여인을 보면서 생멸심(生滅心)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동요하는 마음의 상과 순수한 마음의 상의 두 종류가 있는 것을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중생심(衆生心)은 진여심(眞如心)과 생멸심(生滅心)으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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