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 동산법사단 혜일 헐방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

wonho lim(혜일) 2020. 7. 21. 14:36

"쉬지 않고 쏟아지는 폭포수"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라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다." 이는 3조 승찬대사의 신심명(信心銘)에 첫 구절입니다. 지극(至極)한  도(道)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 표현하려니 부득이 지극한 도라고 했을 뿐, 도에는 지극한 도니, 평범한 도니 그런 명칭이 붙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지극한 도에 대한 정견(正見)이 없이는 배워나갈 수 없기  때문에 부질없는 설명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글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말은 글이 아니면 뒷사람에게  전할 수 없고  말로서는 뜻을 다 전할 수가 없지만 뜻은 말이 아니면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는 물이 지극한 물입니다. 물고기와 물은 분리될 수가 없으니까요. 물고기와 물은 한 몸입니다. 그래서 물고기 눈에는 물이 보이지 않고 허공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배우려는 지극한 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우리도 도 속에 있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말입니다. 우리가 이미 도 속에 있다는 말은, 도(道)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도에는 안과 밖이 없습니다. 원융무애(圓融無碍) 하기  때문에 안팎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본래의 나입니다. 그래서 3조 승찬스님은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깊은 뜻을 알아야 합니다. 도에서는  물과 허공이 다르지 않을뿐더러 일체(一切)가 원융무애 합니다. 3조 승찬스님은 지극한 도가 삶이 되었기에 이런 말씀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겁니다. 지극한 도는 사람마다 온전히 갖추어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 밝은 스승들은 사족(蛇足)을 붙이고 설명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설명하는 일이 중생을 위하는 길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이해가 되지 않으면 아예 수행하려는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 이렇게 허물을 안고 들어가고 있습니다.

 

도(道)는 이해의 문제가 아니고 직접 체험한 만큼 즉 믿는 만큼 보입니다. 요즈음 말로 아는 만큼 보이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정견(正見), 즉 바른 믿음입니다. 우리 모두가 본래 부처임을 바로 믿는 겁니다. 모자라거나 보태거나 없는 것을 새로 만드는 게 아니라 본래 원만 구족(圓滿具足)함을 바로 보는 정견을 말합니다.

 

우리가 유년 시절, 청소년 시절, 어른 시절 등을 계속 변하여 오다 보니까 어느 때를 나라고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마치 어름으로 정성 들여 잘 조각해놓은 조각상을 햇볕에  내놓으면 살살 녹아가는 모습과 우리가 늙어가는 모습이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육신으로서의  변해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이 사실을 분명히 바로 보는 것, 이것을 바른 믿음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변해가는 원인과 결과  즉 연기법(緣起法)을 분명히 바로 보고 바로 행하는 것을 정견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원리를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하며, 유혐간택이라고 할 때 간택할 물체가 없다는 겁니다. 실체가 없는 그림자를 두고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니 지극한 도는 간택함을 꺼린다는 깊은 뜻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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